영생의 샘물을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4:1-26)
영생의 샘물을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4:1-26
오늘 말씀의 주제어는 “물”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는 세례, 우물, 생수, 목마름 등 물에 관한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늘 물을 마십니다. 일을 할 때도 마시고, 쉴 때도 마시고,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목이 마르면 일어나 물을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합니다. 물을 일주일에 한번 또는 한 달에 한번 마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몸이 끊임없이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보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매일 계속해서 깨끗한 물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물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한 여자를 만나서 주시겠다고 하시는 “물”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리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물론 우리가 몸을 위해 마시는 물이 아닙니다. 그 물은 우리 영혼이 늘 필요로 하며 갈급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몸이 매일 물을 마셔야 하듯이, 우리 영혼이 갈급해 하며 매일 마셔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면 우리 영혼의 물은 “사랑” 또는 “사랑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난 이 사마리아 여자는 과거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으며, 지금은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녀의 영혼의 갈증을 “남편의 사랑”을 통해서 채우고자 했습니다. 한 매력적이고 다정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우물”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아무리 깊이 파도 그녀가 원하는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콸콸 뿜어내는 그런 우물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여자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나서 다시 “사랑의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파면 팔수록 단단한 돌덩어리들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여자는 남자들 사이에서 “사랑의 우물”을 찾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또 하나의 우물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영혼의 갈증은 고통스럽고 절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 그리고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샘물이 내 안에 설치되어 있어서 다시는 우물을 찾아 여기저기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것들을 의존하지 않고도 “행복하고 만족하며 기쁜 영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물이 없이는 절대로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나 세상의 것들로부터 얻는 “즐거움”이란 참으로 보잘것없습니다. 아주 잠깐 갈증이 해소되는가 싶으면 다시 더 큰 목마름이 찾아옵니다. 잠시의 행복조차 그것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마음 놓고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허무와 절망뿐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물 곧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며 우리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은 무엇일까요? 이 물은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따라 말하자면, “우리 속에 마르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의 우물을 설치하러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이 우물은 마음을 열고 그 선물을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무료로 설치됩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하나님의 선물”이란 성령님을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2:38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또 누가복음 11:13절에서 예수님은 “천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선물” 곧 성령님을 전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목 마른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수고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십니다. 다시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마르지 않는 샘이 되셔서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로마서 5: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사랑”이 샘솟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을 받게 되며, 그 안에서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피로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시며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며, 우리로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며 그 사랑을 충만이 누리게 하십니다. 이 삼위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날로 더욱 거룩해지며, 신령해지며,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게 있어 물이란 “사랑의 기쁨”입니다. 이는 곧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심히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마을의 한 술집에서 남정네들이 모여 왁자지껄하면서 즐겁고 유쾌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쾌활한 웃음 소리로 시끄럽던 술집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진지해지고, 목소리도 낮아졌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 마을 교회의 목사님이 술집에 찾아 오신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목사님이 떠나자 술집 안은 곧 이전의 쾌활한 분위기로 돌아갔습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은 사람들을 즐겁고 기쁘게 하시는데 별로 “경쟁력”이 없어 보이십니다. 일 때문에 가끔 Red Sox 경기가 있는 날 저녁 Fenway에 있는 Tavern에 갈 때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정말 사람들이 즐거워할 만한 모든 것들이 모여있습니다. 여유로운 저녁 시간, 시원한 맥주와 맛있는 음식, 오랜 친구와 다정한 연인, 대문짝만한 TV 스크린에 중계되는 흥분되는 야구 게임,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들뜬 분위기, …… 이 즐거운 공간에 하나님을 위한 자리는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즐거운 분위기를 깨뜨리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의 샘물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부담스럽고 심지어 싫어하는 대상이 되셨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죄”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가 죄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세상의 속이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만듭니다. 세상은 감미로운 유혹으로 이런 우리의 죄성(sinfulness)에 매우 강력하게 어필합니다. 전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한 불륜 조장 사이트가 있었습니다. 그 사이트의 표어는 “Life is short Have an affair”입니다. 번역하자면, “인생은 짧다 불륜을 즐겨라” 이런 뜻이겠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는 어찌하든 우리의 목마른 감성을 자극하여 우리의 시선을 끌어보려는 수없이 많은 감각적인 “즐거움의 유혹들”로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감각적인 유혹들”로 우리의 죄성에 어필하는 일을 절대로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즐거움에 익숙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 즐겁게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결국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의 마음을 얽매고 있는 “죄”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나님 사랑”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그녀의 죄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자는 깜짝 놀라며, “나는 남편이 없는데요” 하고 부인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는 이 처음 보는 유대인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 챌 것이 두려워 조마조마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미 그녀의 과거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건네시고, 하나님의 선물을 소개하셨습니다. 심지어 주님 앞에 과거가 드러나 벌거벗은 그녀를 “옳다! 참되다!” 하시며 감싸주시고 다독거려주셨습니다. 이 예수님 앞에서 여자는 평생 처음으로 평안함, 자유로움, 기쁨, 그리고 참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는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자는 자신의 갈증을 해소할 “한 그릇의 물”을 얻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습니다. 여자로서 한 명의 남자를 상대한다는 것은 실로 몸과 영혼을 소진시키는 매우 피곤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의 지독한 목마름 때문에 한두 명도 아닌 무려 다섯 명의 남자들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물을 구하지 못해서 다시 여섯 번째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즐거움의 현실입니다. 세상 즐거움의 유혹들은 늘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감질나는 것이어서, 그것을 잡으려고 지치도록 애를 쓰지만 목마름이 더 심해질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고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십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너무 쉬워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깊은 영혼의 대화를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찬양 집회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거나, 철야 기도모임에서 마루를 뒹굴며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 영혼이 예수님의 만나 주님과 깊고 인격적인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하시고, 놀라게도 하시며, 때로는 울게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끄시며, 참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또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