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반석에서 샘물을 내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7:1-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11. 21. 05:14

반석에서 샘물을 내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7:1-7

 

한국이나 미국이나 요즘 대통령 문제로 매우 시끄럽습니다. 믿고 존경할만한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새삼 뼈저리게 실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픈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좋은 지도자들을 분별하여, 선출하고, 세우는 일은 여전히 어려워 보입니다. 이것은 좋은 지도자들이 흔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지도자를 뽑는 사람들 곧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진리로 사람들과 맞서는 정직한 지도자를 싫어하고, 거짓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교묘하게 다루는 사기꾼들에게 쉽게 속기 때문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으며, 쉽게 고쳐지지도 않으며, 심지어 갈수록 더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무도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좋은 대통령을 만나게 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썩 들지 않습니다.

 

성격은 다르겠지만 이러한 갈등이 세상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에도 있습니다. 세상과 다른 점은 우리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온전하시며 완벽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경배할만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도 행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만큼이나 우리의 죄와 허물도 더욱 크고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우리들 사이에 여러가지 불미스러운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도 그러한 사건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참 목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세의 지도 아래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신 광야를 떠나서 르비딤이라는 곳에 텐트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백성들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갈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중동의 사막 한 가운데 있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의 수가 수백 또는 수천도 아닌 이백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무리입니다. 동행하는 동물들까지 더하면, 이들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물이 필요한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런데 물기라고는 사방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꼼짝없이 이 사막 한가운데 갇혀 목말라 죽을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절박해진 백성들은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문제의 절박함을 생각하면 백성들의 불평이 이해가 됩니다. 또 그들을 이 물 없는 사막 한 가운데로 이끈 것에 대해, 모세는 당연히 백성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반문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여기서 다툰다는 말은 불평한다 (complain)’ 또는 투덜댄다(murmur)’라고도 번역됩니다. ‘불평이란 쉽게 말해서 불만족의 표현입니다. 원론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아무런 불만도 없어야 하며 따라서 불평도 없어야 합니다. 심지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수백만의 사람들과 짐승들이 꼼짝없이 목이 말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말씀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생긴 이 갈등의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백성들은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고 2절에 모세는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 갈등은 내 목숨하나님의 이름사이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과 그 자녀들과 가축들의 생명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며, ‘하나님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선은 내가 살아야 합니다. 물론 내 자녀들의 행복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생축입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축이란 곧 재산을 의미합니다. “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하나님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생축다음으로 중요한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나와 내 자녀들과 가축들이 목이 말라 죽게 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시험한다고 책망했습니다. 7절 말씀은 그들이 어떻게 여호와를 시험했는지를 부연하여 설명합니다. 이는 백성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 (the presence of God)”을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불평을 하며 모세와 싸웠습니다. 이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면 이런 어려움이 생길 리가 없었습니다. 이들의 이런 불만과 불평은 사실상 하나님을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그들의 마음 속에서 죽이고 쫓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여전히 그들을 인도하시며 돌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결코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21편은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신실하심을 실감나게 노래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하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리로다.

 

이 시편의 작가가 노래하듯이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물 없는 곳으로 인도하셔서 목마름의 고통을 주신 것일까요? 사실 물 없는 광야야 말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장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곳 물 없는 광야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함께 하심을 가장 잘 드러내실 수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지만, 달리 보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곳에 인도하시고 그들 앞에서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물 없는 광야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시험하는 곳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 없는 광야는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으로 들어가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내 안으로 임하시는 곳입니다.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라는 분이 있는데 이분은 17세기에 살았던 프랑스의 수도사입니다. 이분의 편지들과 가르침들을 모아 편집한 하나님의 임재 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라는 기독교 고전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로렌스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연습하고 또 어떻게 그 임재하심을 항상 느낄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I renounced, for the love of Him, everything that was not He; and I began to live as if there was none but He and I in the world.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오직 하나님과 나 둘만 있는 것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로렌스 형제의 말에 비추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그 고난의 상황이 사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연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로렌스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이란 물론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인정하며 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스치는 바람 속에서도,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홀로 있는 골방 속에서도, 바쁘게 손을 놀려 음식을 만드는 와중에도 항상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 백성들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사랑 안에 거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 때야말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가장 생생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악인들의 손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아버지께서 주신 잔으로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를 받으신 것이며, 여전히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그 안에 거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높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수를 치던 모세의 지팡이는 나일강을 쳐서 그 물을 피로 바꾼 그 지팡이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듯이, 자신의 함께 하심을 의심하며 불평하는 백성들을 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치시는 대신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솟아나는 신령한 물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치지 않으시고,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심은 이제 세상의 죄악된 물을 마시지 말고, 반석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께로부터 솟아나는 신령한 물을 마시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목도하듯이, 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목마른영혼들에게 많은 것들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참 목자가 될 수 없으며, 아무도 우리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는 신령한 물을 주십니다.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물을 찾아 헐떡이며 주님의 임재하심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대신, 오히려 나의 눈을 가리는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전심으로 주님의 임재하심을 연습하고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반석 되신 예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신령한 물을 마시며 참된 복락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