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요한복음 19:16-30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앙리 샤리에르라는 실존 인물의 자전적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스티브 매퀸(빠삐용 역)과 더스틴 호프먼(루이 역)이 주연한 1970년대 미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빠삐용은 누명으로 쓴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는 자유를 찾아 여러 차례 탈옥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다시 잡히며, 결국은 “악마의 섬”이라는 외딴 섬에서 또 다른 무기수이며 친구인 루이와 함께 남은 생을 보내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빠삐용은 자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이 절해고도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는 파도의 흐름을 분석하고, 자신과 친구 루이를 위해 작은 부유물(float)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사나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루이는 두려운 나머지 이 무모한 도전을 포기했습니다. 다음은 절벽 꼭대기에서 섬을 떠나는 빠삐용과 남아있는 루이가 마지막 순간에 나눈 대화입니다.
루이: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빠삐용: 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루이: 음…… 미안해.
빠삐용: 알아.
루이: 넌 죽을꺼야. 너도 알잖아!
빠삐용: 그럴지도 모르지!
루이: 제발 그만 둬.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순한 어린 양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죄수들과 함께 못박히셨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제비를 뽑아서 그 속옷을 취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그 모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셨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시고 다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영혼이 돌아가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라고 맡기신 일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 향기로운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선포하신 모든 말씀들, 행하신 모든 일들, 보이신 모든 은혜들, 그리고 남기신 모든 약속들을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샘”으로 확정하는 강력한 피 뿌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위해 영원토록 없어지지도, 변하지도 않을 샘을 주신 것입니다.
위에 보이는 세 다이어그램들은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각각 우리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종류의 삶을 나타냅니다. 첫째 다이어그램은 보통 사람들의 삶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삶이며, 마지막으로 셋째 다이어그램은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의 삶을 나타냅니다. 또 이것은 제 블로그의 로고이기도 합니다.
첫째 다이어그램에서는 흰 색으로 표시되는 ‘생명’이 검은 색으로 표시되는 ‘죽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입니다. 살아있지만 죽음에 갇혀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영역은 매일 조금씩
줄어들며, 결국은 죽음 속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어찌 보면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절해고도에 갇힌 빠삐용과 같습니다. 이 작은 섬은 죽음의 바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곳에서 당분간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겠지만 죽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사나운 파도가 넘실대는 검푸른 바다를 보면 두려움이 앞섭니다. 바다에
뛰어들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생명이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절은 이런 자연 상태의 사람들을 가리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두려움의 종”입니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왜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때, 결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보면, 모세의 지도 하에 애굽을 빠져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물이 없거나 먹을 것이 없는 심각한 문제들을 겪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들은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을 합니다.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하며 비명을 지릅니다. 애굽 땅에서 배불리 먹던 때를 추억하며, 그 땅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가나안 땅에 거인들이 살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온 백성이 밤새 울부짖습니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죽음의 두려움에 갇힌 삶은 결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일생 두려움으로 많은 불순종의 죄를 지으며, 결국은 죽음과 영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둘째 다이어그램에서는 흰 색으로 표시되는 ‘생명’의 한 가운데 검은 색으로 표시되는 ‘죽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예수님의 생명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이 아버지께 있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불순종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붙드셨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5: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죽음으로 생명을 얻는 이 십자가의 길은 다만 예수님의 삶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신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자손들이 원수 하만의 모함으로 모두 죽게 되었을 때, 왕후 에스더는 궁중의 규례를 어기면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이를 통해 에스더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보내시는 편지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b).
셋째 다이어그램은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천들의 삶을 표시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일생 죽음의 두려움에 갇혀 살다가
결국은 죄 가운데 죽게 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져 있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죽음에 갇혀 있는 ‘생명’이 죽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죽으면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게 됩니다. 이제 죽음의 바다를 건널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빠삐용과 루이의 마지막 대화에서 루이가 빠삐용에게 말합니다. “넌
죽을꺼야. 너도 알잖아!” 그러자 빠삐용은 바다 저편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악마의 섬에 갇혀버린 자신의 생명을 이미 버렸습니다. 거기에 아무런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저 검푸른 바다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저 바다 건너편에 있는 “꿈에 그리는 자유”를 보았습니다. 그는 파도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파도는
자신을 죽이는 파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바다 건너편으로 실어다 줄 소망의 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선물로 받을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에 갇힌 비참한 종의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빠삐용이 악마의 섬에서의 삶을 버리고 바다 저편의 소망을 향해 두려움 없이 몸을 던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의지할 유일한 빛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안에 있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다른 빛들과 소망들은 오히려 우리의 눈을 가리며, 우리의 마음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이제 모든 불을 끄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해서 “죽음의 바다”를 건너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두려움으로 인해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실수를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신명기 30:20절은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불순종의 죄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시며, 우리 속에 이 하나님께 대한 “생명의 질서”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매일 선택해야 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에 갇혀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일어나 걸어갈 것인가? 주님의 십자가는 절대로 우리를 괴롭히거나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바다 저편에 있는 영원한 참 소망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빠삐용처럼 죽음을 이기는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나의 생명의 길로 견고하게 건축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