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마태복음 9:9-1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4. 24. 04:31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마태복음 9:9-13

 

성경은 우리 영혼에 샘물과 같습니다. 물 없는 사막과 같은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자주 목마름, 피곤함, 절망감을 느낍니다. 또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거나, 구덩이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조용히 앉아서 성경책을 펴고, 말씀을 읽으면 참 좋습니다. 거짓말처럼 신기하게 우리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임하고, 팔다리의 힘줄에 힘이 생기며, 없던 길이 열리고, 소망의 빛이 보입니다. 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이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의 눈이 열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고 계심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 또한 길 잃은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고 평화롭게 합니다.

 

마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거두는 세리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죄인으로 낙인 찍혀 미움과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그 중 일부는 그 땅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들에게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차지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세리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나아와 묻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에 요한은 정한 세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보면, 아마도 그 당시의 세리들은 법에 정한 세금 외에, 불법하게 돈을 거두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성이 강하고 도덕성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리들은 돈을 위해 동족들을 배신하고 이방인들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괴롭히고 불법을 일삼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리들을 기생충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마태는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태를 외면하고, 피하고, 멀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관심을 가지고 그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마태는 기생충 같은 죄인 세리였습니다. 그것이 마태의 전부였습니다. 더 이상 볼 것도, 들을 것도, 생각할 것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 세리속에 갇혀 있는 불쌍한 마태를 보셨습니다. 그의 영혼의 고뇌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모든 것을 보시며 모든 것을 들으십니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낱낱이 보시고 들으십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시편 139:1-4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족하시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마태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하시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심또는 소명대해서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말을 합니다. 우리는 자주 부르심을 어떤 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은 나를 좇으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의 전부이며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7). 그런데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 또한 나를 따르라입니다 (요한복음 21:19,22). 예수님의 부르심은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 일어나는 생활이며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통째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르심은 곧 예수님께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어떤 일이나, 어떤 장소나, 어떤 단체로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오직 예수님자신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또한 이 부르심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초대나 권유가 아닙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권위와 권능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제 주님께서 나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서약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는 곧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 마태의 모습은 부르심을 받은 자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저자는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하며 마태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예수님을 일어나 좇았다고 말합니다. “앉아 있다는 말과 일어나 좇았다는 말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것은 세리 마태로서의 이전의 삶과, 제자 마태로서의 이후의 삶을 함축적으로 설명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앉을 자리,” 또는 누울 자리를 구합니다. 그 자리가 권세를 부릴 수 있는 높은 자리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는 삶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구하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어나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정착한 거주민(resident)”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나그네(pilgrim)”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매여있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마가복음 1:18절에 보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마태가 일어나예수님을 좇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칼로 무를 자르듯, 가위로 줄을 자르듯 그들의 과거의 삶을 딱 잘라버렸습니다. 거기에 어떤 미련도, 미안함도, 미적거림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나그네(pilgrim)”로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은 부르심을 받은 자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할 것을 여러모로 강조합니다. 롯의 아내는 아쉬움으로 뒤를 돌아 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창세기 19:27).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하십니다 (누가복음 9:62). 사도 바울 또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좇아가노라"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14). 예수님을 좇는 우리의 삶은 매일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무거운 짐들을 벗어버림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최대한 가볍고 자유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뒤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에 매이지 말고, 우리 앞에 있는 것 그리고 하늘 위에 있는 것에 마음의 닻을 내리고 고정시켜야 합니다.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이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참석하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 한 사람을 부르셨지만, 이를 통해 마태와 비슷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한 사람을 콕 집어서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그렇게 친밀하고 인격적인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은 수 많은 영혼들을 마치 한 사람을 사랑하시듯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는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잔치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어도, 마치 내가 주인공인 듯 주님께서 나를 알아보시고, 반기시고, 함께 하시고, 섬겨주십니다. 누군가와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나 자신을 그 사람과 동일시(identification)”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자신을 많은 세리와 죄인들속에 파묻으신 것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 그룹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신입 사원 시절 한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점심 시간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현대 그룹의 설립자인 정주영 회장이 몇 명의 임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같은 테이블에 앉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모두 내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식반에 같은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분의 소탈한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렇게 역사적인 인물과 같은 장소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들은 죄인들을 멀리하고 배척할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의 부르심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합니다. 성경에는 은혜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은혜의 뜻을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나님의 일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실 수 있게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그에게 어떤 일을 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의사가 병든 자를 불러서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의 치료를 받는 환자가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의사의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살립니다. 부활에 이르는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예수님께서 마태를, 그리고 우리 각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질 때, 내가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과 세리 마태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마태가 한 일이라고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일어나 좇은 것뿐입니다. 일단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이제 그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온전히 보호하시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며, 주님께서 치료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매일 영의 눈을 뜨고 주님을 보며, 영의 귀를 열어 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매일은 주님과의 잔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매일은 내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은혜입니다. 이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마음껏 자유롭게 일하시도록 온전한 순종을 드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