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시편 90:1-1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8. 5. 14. 01:07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시편 90:1-17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거처(dwelling place)"란 살고 있는 곳, 거주지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때로 "산성"(시편 28:8), "피난처"(예레미야 16:19)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 중에 보호하시는 보호처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거처"는 보다 크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거처"는 비록 나 자신은 아니지만 나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 비해 요즘 사람들은 보다 쉽게 거처를 옮겨다니며, 심지어 우리처럼 자신의 본 나라를 떠나서 타국으로 이주하는 것도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농사를 짓거나 짐승을 키우며 절대적으로 ""을 의존하여 살던 사람들은 "거처"가 그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거처를 벗어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미국의 여류 소설가 펄 벅(Pearl Buck)이 쓴 '대지(The Good Earth)'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근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왕룽이라는 농부인데, 그는 자신과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으로부터 왔으며 또한 ""이야말로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고 믿습니다. 농사짓는 일에 관심이 없는 그의 아들들이 땅을 팔려는 낌새가 보이자 그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땅을 팔기 시작하면 그 집은 그것으로 끝장이다. 우리는 땅으로부터 왔다가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땅을 갖고 있는 한 너희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 땅은 아무도 도적질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It is the end of a family when they begin to sell the land. Out of the land we came and into it we must go - and if you will hold your land you can live - no one can rob you of it.)" 시편 기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거처"라고 부를 때, 이 말을 "왕룽의 땅"을 연상하면서 이해하면 좀 더 마음에 와닿지 않을까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를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행위를 "낳으셨다," "조성하셨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일이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낳듯이, 그리고 장인이 걸작품을 만들어내듯이 많은 수고와 정성과 지식과 솜씨를 쏟아부으신 아름답고 신비로운 일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기가 엄마를 닮듯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창조 역사의 이러한 특징들은 창세기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창세기 1:31절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며, 2:2절은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온 힘을 다하셔서 세상과 우리 사람들을 심히 아름답게 지으셨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생명체들을 빅뱅(Big Bang)이나 진화(evolution)와 같은 "우연의 산물"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 대신 "수백억 년의 시간과 수천억x수천억 번의 우연한 사건들"이 모여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신비로운 우주와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와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명체들이 생겼났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조금만 연구해봐도 그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편 19: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무한한 우주와 그곳을 가득 채우며 조화롭게 운행하는 별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충만하심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허공에 떠있는 거대한 땅덩어리지만 생명체들의 완벽한 서식처로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생명체들이 살기에 적합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바닷물은 낮에는 땅의 열을 식히고 밤에는 온기를 유지시켜서 지구의 온도가 밤낮으로 급격히 바뀌는 것을 막아줍니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지구 전체의 기온이 적절히 유지되고 동시에 공기의 흐름을 유발시켜 생명체들에게 쾌적한 생태 공간을 제공합니다. 지구의 자전축은 23.5도 기울어져 있는데 이것은 계절의 변화를 일으키며 지구상에 생물이 살 수 있는 면적을 극대화시킵니다. 대기는 우주에서 날아들어오는 이물질들과 해로운 태양열로부터 지구의 생명체들을 보호하며, 대기중의 산소 농도(20.08%)는 화재의 위험이 없이 생명체들이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달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일으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을 위한 서식지를 만들며, 목성은 외계로부터 쏟아져들어오는 운석들을 빨아들여 차단함으로써 지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진공청소기입니다. 이것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수없이 많은 증거들의 지극히 일부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거처는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그 영광을 먹고 마시고 숨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3절부터 시편 기자의 시선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 사람에게로 옮겨집니다.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해 사람은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묘사된 우리 인생의 삶은 크게 세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무상함(덧없음 - transience)"입니다. 곧 사람의 일생이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순식간에 지나가는 죄악의 날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생각할 때, 그 속에 살고 사람들의 형편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이 말씀은 창세기 3:19절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에게 주신 말씀을 시편 기자가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사람이 짧은 인생을 살다가 죽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범죄한 결과입니다. 죄를 범함으로 사람은 본래의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잃고, 하나님 대신 흙을 의지하여 살며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 '대지'의 주인공 왕룽처럼 일생 땀을 흘리며 땅을 갈고, 그곳에서 생산된 것으로 연명하며, 결국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고 또 하나님을 거처 삼아 행복하게 살아야 될 사람이 이제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 아래 고생스러운 삶을 살다가 순식간에 풀처럼 베어지는 우리의 모습을 저는 "암세포"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사람 몸에는 여러 종류의 세포들이 있습니다. 각 세포들은 자기의 정해진 위치에서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합니다. 간에는 간세포, 피부에는 피부 세포, 신경에는 신경 세포 등이 있어서, 하나의 몸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그 몸이 필요로 하는 각각의 기능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상 세포들과 다른 변이된 세포들 곧 암세포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정상 세포들과는 달리, 고유한 역할을 갖고 수행하지 않으며, 무제한으로 증식하며, 또 정해진 위치가 없이 온 몸으로 전이됩니다. 사실 '암세포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들은 매우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몸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대로 무한히 숫자를 늘리며 번성할 수 있고, 또 몸 안에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세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암세포의 거처가 되는 몸의 입장에서 보자면, 암세포란 아무 쓸모가 없이 몸을 해치기만 하는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몸은 이런 암세포에 대해서 분노하며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죄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마치 몸을 괴롭히는 암세포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거처로 삼아 살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온갖 은혜들을 누리며 살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의 삶을 가리켜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과 같다"고 합니다 (5). 풀은 아침에 꽃을 피우고 자랍니다. 그 푸르름과 아름다움이 영원할 것 같지만 곧 저녁이 되어 꽃은 시들고 풀은 베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늘 푸르름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삽니다. 더 젊어지길 원하고, 더 건강하기를 원하며, 더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잠깐 자는 것" 같은 이 덧 없는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켜보려고 애를 씁니다. 마치 아침에 깨어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사람이 "오분만 더, 오분만 더" 하며 이불 자락을 붙들고 발버둥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좀 더 오래 자는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날들은 그저 순식간일 뿐입니다. 아주 건강하여 80, 90, 100세를 산다고 하더라도 다만 수고와 슬픔일 뿐이며, 그마저도 쏜 살처럼 날아가버립니다 (10). 매우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우리의 비참한 형편을 제대로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이며,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구원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것이 '암세포' 같이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우리가 비로소 우리의 몸이 되시며 우리의 진정한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눈을 돌리는 turning point가 되는 것입니다. 11,12절 말씀입니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시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최근 하와이의 Kilauea 화산이 분화하면서 용암과 유독가스들을 내뿜고 있습니다. 낙원과 같던 땅이 삽시간에 시뻘건 용암에 뒤덮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이 시뻘건 용암과 같습니다. 비록 아름다운 수풀과 초원으로 덮여있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서 있는 바로 밑에서 삼킬듯이 무섭게 끓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노의 능력을 알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이며 오히려 참소망의 시작인 것입니다.

 

13-17절은 시편 기자의 "기도"입니다. 그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기도합니다. 그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간청합니다. 이제 노를 푸시고 우리의 자비하신 주님으로 돌아오시라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옛날을 기억하고 그리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세상과 사람이 낙원에 거하며 주님의 사랑을 먹고 살던 시절을 추억합니다. 그 때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이 소망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사실 이 기도는 이루어진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가운데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온 몸으로 받으시며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비참함의 근원인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해소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또 우리를 부활과 영생의 소망으로,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 살게 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암세포가 '건강한 줄기세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붙어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신령한 세포로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사 우리에게 돌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로새서 1:6).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며 다시금 주님의 자녀들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벗어나면 우리는 다시 "" "하나님의 진노" "무상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잠시 "단백질 덩어리"로 살다가 "흙덩이"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크심과 예수님의 구원의 크심은 이 광대한 우주와도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오직 이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거처"가 되십니다. 이 주님의 은총만이 우리를 즐겁게 하시며, 우리를 만족케 하시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의미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14-17절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