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영생을 얻는 길 - 선하게 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누가복음 18:18-2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8. 7. 2. 05:02

영생을 얻는 길 - 선하게 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누가복음 18:18-27

 

우리는 자주 어떤 사람에 대해 그 사람 착해!” “그 사람 괜찮아!”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등의 말을 합니다. “네가 최고야 (You are the best)!”라고 추켜세우며 칭찬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선함을 인정하는데 너그러운 편이며, 또 내심 그런 칭찬을 듣기를 원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선한 사람혹은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한 삶, 우리의 자존감, 우리의 평안, 이웃들과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국의 소망의 밑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함에 대한 자신감이 무너지면 결국 이런 인생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이며, 스스로를 매우 비참하고 무익한 존재로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고자 그리고 착하다는 말을 듣고자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냥 착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착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며 영생을 얻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에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착하게 살아온 선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십니다. 한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우리는 그가 어떤 종류의 관원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9:20절에 따르면 그는 아직 젊은 사람이었으며, 또 오늘 본문에서는 그를 큰 부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3). 어쨌든 그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다 경제적 부를 누리며, 게다가 어려서부터 율법들을 잘 지켜온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관원은 오래 전부터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중요한 질문을 들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관원의 이 간절한 질문에 대답하시기 전에 먼저 다른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선한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을 거절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뭔가 획기적인대답을 기대하고 온 이 젊은 관원에게 예수님께서는 다만 그에게 매우 익숙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는 이 계명들을 잘 알지 않느냐? 가서 그것들을 행하라!” 예수님의 이 대답이 이 관원에게는 실망스럽게 들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조차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거부하셨습니다. 당연히 그 마을에서 사람 좋기로 유명한이 젊은 관원 또한 전혀 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외에 선한 사람은 없느니라. 너는 그냥 이런 저런 선한 일들을 열심히 하거라.” 선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선한 일을 할 뿐입니다. 이 말을 하려고 오늘 설교의 부제를 선하게 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To Be Good vs. To Do Good)”으로 잡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내게 당신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You are good)!”라고 말해줍니다. 이렇게 인정을 받으면 내 마음이 좋아지고, 더욱 선한 일에 열심을 냅니다. 우리는 더욱 좋은 사람이 되고 마침내 천국에 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바 바람직한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열심에 찬물을 끼얹는 것같이 들립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선하게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라하시는 듯 합니다. 우리가 선하게 될 수 없다면 우리의 모든 선한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심지어 예수님과 같이 선하신 분조차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리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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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저는 자주 해와 햇볕 그리고 햇볕을 사용하여 우리가 하는 일들을 은유로 사용합니다. 하늘에는 해가 떠있고, 이 해는 우리에게 빛을 보내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햇볕을 이용하여 많은 유용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에 보면, 여자 아이가 햇빛이 비추는 가운데 그림책을 보고 있습니다. 책에 비추어진 태양 빛이 반사되어 아이의 눈에 닿으면 아이는 이를 통해 책의 그림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햇볕을 이용하여 식물을 기릅니다. 햇볕이 없이는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습니다. 식물에게 햇볕은 그들이 먹는 음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아주머니가 볕이 좋은 날에 고추를 말리고 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은 태양 아래 선탠을 즐깁니다. 우리는 또 태양열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연 속에 일어나는 물 순환 시스템 조차 해가 그 빛을 땅과 바다에 비추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 태양이 떠서 비출 때, 땅에 온갖 좋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태양이 보내주는 빛을 이용하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햇볕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햇볕 자체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빛은 오직 해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빛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좋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햇볕을 만들 수 없으며, 빛의 근원인 태양을 만드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해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 햇볕을 허비하지 않도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섬머타임(Daylight Saving Time)을 시행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햇볕을 만들려고 하거나 해가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해도, 햇볕도 아닙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을 이용하여 일하고 또 이를 즐길 뿐입니다. 이것은 선한 사람이 되는 것과 선한 일을 하는 것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해와 같으십니다. 작열하는 태양이 빛을 쏟아 내리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선하심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이 자비로운 은혜를 이용하여 우리는 땅에서 많은 선한 일들을 하며, 또 하나님의 눈부신 선하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마치 해와 같이 오직 그의 선하심으로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십니다. 반대로 우리는 해도, 햇빛도 아니며, 따라서 전혀 선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태양의 밝음에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아 누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이런 노력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신의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죄의 짐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선하기를 원하지만, 자신을 돌아볼 때 전혀 그렇지 못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이 행한 일들,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들, 자신의 마음 속에 품은 생각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며, 이런 죄의식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 깊은 절망에 빠질 뿐입니다. 사람들의 선하고자 하는 노력을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가져가셨으며 우리의 더러운 양심을 깨끗이 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미 깨끗하고 선합니다 (의롭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로 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선해지고자 노력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며, 또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해보겠다며 허망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선하고자 애를 쓰면 우리는 곧 예수님께로부터 떨어져 분리되고, 사단의 덫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사단은 늘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부추깁니다. “어이 친구! 자넨 이것보다 더 잘 할 수 있어! 왜 이런 식으로 너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자애로우신 은혜를 떠나서 다시 무자비한 율법 아래 비참한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또 우리가 선하고자 할 때 이는 우리를 위선(외식 – hypocrisy)으로 인도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선하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선하게 되는 대신 선하게 보이려고노력합니다. 저의 계산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좋게 보이게 하기 위해 일생 동안 그들이 갖고 있는 삶의 자산의 98.25%를 허비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 에너지, , 그리고 마음을 선하게 보이는데소모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들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의 선하려는 노력은 많은 부작용들을 가져옵니다. 그 중 제가 꼭 언급해야 할 최악의부작용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하려는 노력은 사실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려는 시도이며, 이것이야말로 최악이며 심지어 예수님의 희생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죄입니다.

 

우리는 선하고자 하는, 선하게 보이려는, 그리고 선하다고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야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밤낮으로 선한 일을 하는데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누가복음 17:7-10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행한 후에 할 말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뭔가 불공평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자유이며, 우리의 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함에 최선을 다하며, 동시에 선한 사람이 되거나 선한 사람으로 인정 받는 것은 꿈에라도 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이 젊은 관원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잘 했구나! 그러면 이제 너는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실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를 들은 관원은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매우 큰 부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에 있는 보화를 상속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땅에 있는 보화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둘 다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No!”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 심하게 들립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놀라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거의 그들의 숨겨진 마음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깊은 마음 속에는 그들이 포기한 것보다 몇 십 배 더 많은 보상을 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 자신이 그들이 바라보는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뭔가 다른 것을 구하며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The Cloud of Unknowing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운 눈으로 보시는 당신은 지금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혹은 그 동안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아니라 앞으로 당신이 되기를 원하는 그 사람입니다 (It is not what you are or what you have been that God sees with his all-merciful eyes but what you desire to be).”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나의 어떠함은 현재의 나(what I am)’ 혹은 과거의 나(what I have been)’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어떠함은 내가 진정으로 되고 싶어하는 사람(what I desire to be)’으로 결정됩니다. 이 젊은 관원은 영원한 생명을 원했지만,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자들 또한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랐지만 언젠가는 이 관원처럼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헌신된 크리스천들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이 마음 속으로 되기를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뭔가 다른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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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이라는 미국 작가가 쓴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한국의 중학교 교과서에도 오랫동안 실렸던 소설입니다. 사람들은 호손이 미국 뉴햄프셔주의 “The Old Man of the Mountain”이라는 바위를 기초로 이 이야기를 썼다고 믿고 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은 거대한 바위인데 이것을 멀리서 보면 한 남자의 얼굴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냥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매우 고상하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이 소설에서 큰 바위 얼굴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모든 형상들이 다 고상하며, 그 표정은 한편으로는 장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냥하다. 마치 거대하고 따뜻한 화로의 불처럼 그 애정으로 모든 인류를 포용하고도 남을 넉넉함이 있다.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교육이 된다.” 이 바위산 아래 계곡에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 이 얼굴을 그대로 닮은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믿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년 어니스트(Ernest) 또한 그의 어머니로부터 이 큰 바위 얼굴에 대한 오래된 예언을 듣습니다. 큰 바위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소년은 매우 흥분하여 손뼉을 치며 소리칩니다. “엄마! 엄마! 나는 그 사람을 보기 위해 사는 것을 내 마음의 소원으로 정했어요(I do hope that I shall live to see him)!” 그리고 이 소년은 그가 말한 대로 삽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을 보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소년이 나이가 들면서 마을에 이 위대한 얼굴을 닮은 듯한 사람들이 몇 명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Gathergold라는 부자이며, 다른 한 사람은 Old Blood-and-Thunder라는 별명을 가진 용감한 군인이며 지휘관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Old Stony Phiz라고 하는 뛰어난 정치가였습니다. 이들 유명한 인물들은 어떤 점에서는 큰 바위 얼굴을 닮은 듯 했지만 결국은 모두 가짜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큰 바위 얼굴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보통 사람들보다도 못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니스트를 실망시켰습니다. 이제 어니스트 자신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는 저녁 시간에, 어니스트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앞에 서서 그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매우 힘이 있었는데, 이는 그 말이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며 그의 생각은 매우 깊이 있고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또한 그가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어니스트는 비록 학교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소박하고 근면한 시골 사람이었지만, 이 모든 것들을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웠습니다. 그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모인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보라! 보라! 어니스트 자신이 바로 큰 바위 얼굴이 아니냐?”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삶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을 따랐으며, 결국 그 사람을 자신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살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 (not follow Jesus to live)”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사는 것 (live to follow Jesus)”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살며 심지어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means)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end)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찾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겸손하셔서 선한 선생님이라 불리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죄인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귀신 들린 자들을 위해서 수 없이 많은 선한 일들을 하셨지만, 그 이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셔서 죄인처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찬양을 받아 마땅하신 분이시지만, 마치 무익한 종처럼 그렇게 사시고, 일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생님이시며,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낮아져야 하겠으며, 얼마나 더 많이 선한 사람로 불리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하며, 또 얼마나 더 열심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선한 일에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사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며 성장하는 매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