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
우리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해서, 제가 말하고 싶은 바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사실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서 따로따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간단히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Christ-centered)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도, 또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중요한 세 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구원(salvation)’이 아니라 ‘구원자(savior)’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사는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어떻게 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운더리(boundary)’가 아니라 ‘하트(heart)’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구원(salvation)’이 아니라 ‘구원자(savior)’입니다.
요절: 요한복음 6:38,39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하지만 이 구원은 오직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오직 구주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이 무엇인지,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구원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구주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권세와 지혜와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원한다면 반드시 구원자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며, 그 말씀을 들으며, 믿음과 순종으로 그를 따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들과 문제들 속에 살면서 늘 ‘구원’을 원하고 찾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는 많은 크리스천들까지도, 구원자 예수님과는 별개로 구원을 얻고자 애를 씁니다. 자신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간다고 해도, 종종 예수님은 ‘구원자’이기보다는 ‘도우미(helper)’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스스로 구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정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얻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모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구원자가 필요 없게 됨으로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다른 구원자’를 찾아서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들 모두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오직 그들 중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나머지 아홉 명 또한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으며, 따라서 이들은 이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구원’을 받은 후, 구원자를 떠났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돌아오지 않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또 예수님께로부터 자신이 기대하는 구원을 얻지 못하자 구주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데 이는 전날에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다시 떡을 만들어주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떡을 주시는 대신,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시고 또 예수님 자신을 “생명을 주는 참 떡”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 주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에게 떡을 줄 다른 구원자를 찾아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신 목적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자로 드러내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바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는 일곱 개의 “나는… (I am)” 으로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6:35); “나는 세상의 빛이라” (8:12); “나는 양의 문이라” (10:7); “나는 선한 목자라”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14:6); “나는 포도나무라” (15:5). 이 말씀들은 모두 여러 측면에서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큰 기쁨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나면 날수록 사람들은 더욱 주님을 반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그들의 자신이 원하는 내용과 방식으로의 구원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할 구원자였습니다. 하지만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 사람들은 여러 번 모세에게 등을 돌렸으며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는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는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음식과 편안한 길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들을 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지고 먹을 것이 풍부한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어, 물도 음식도 없고 길도 험한 광야로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모세를 구원자가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해치는 자로 보고 핍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 아니라 구원자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이 구원자를 순종하고 그를 따라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며칠 전에, 주님께서는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구름 속에 임하신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비록 짧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자는 누구이며,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참된 구원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랑과 기쁨의 관계(loving and pleasing relationship)”가 생기는 것이며, 이것은 오직 구원자 예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알고 믿죠!”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고 부를 때, 이것은 단지 이름뿐인 종교적 타이틀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간절하게 구원자가 필요한지 잘 모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란 책에서, 주인공인 크리스천은 어느 날 자신의 비참함과 또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멸망의 도시’라고 불리는)의 무서운 운명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곧 이 도시를 떠나서 구원을 위한 순례의 길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멸망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크리스천이란 남자가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야말로 정상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이 대체로 괜찮으며, 다만 ‘구원자’의 도움이 필요한 몇 가지 문제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구원자를 떠났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지독한 어둠과, 공허와, 혼돈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심지어 우리 중 가장 위대한 자라도,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과 영원한 저주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희망은 오직 이 구원자 안에 있습니다. 구주 예수님만이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어주는 유일하고 완전한 밧줄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구원자를 따르기 위해서 구원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그를 따르는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비록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9:27절에,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하나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감당한 손해에 대한 보상으로 더 큰 무엇인가를 받기를 기대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베드로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자신이 받은 보화(treasure)이며, 이 보배 되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 자체가 구원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실은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부르심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첫 말씀은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9). 또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 또한 “나를 따르라”입니다 (요한복음 21:19). 이것은 우리의 인생 여정이 구원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심지어 그 길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할지라도 말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결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예수님을 따르며 그에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구원자 되신 예수님 안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우리가 가진 소망’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안에서 구원은 우리가 장래에 받게 될 축복입니다. 비록 이 약속과 소망은 ‘미래의 일’이지만, 구원자 되신 예수님 안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시고 권세 있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38,39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의 구원자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며 소망 가운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둘째,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사는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어떻게 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절: 갈라디아서 2:20
믿는 크리스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은 늘 자신이 어떠한지 또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비록 “올바른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올바른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성품이나 지식이나 외모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자원을 쏟아 붓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또한 대부분의 종교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종교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사람들을 훈육하고 지도하는데 필요한 지침들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초점은 이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초점은 내가 어떻게 사는가(How I live)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시는가(How Jesus lives in me)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가지 이름들을 갖고 계신데, 그들 중 하나는 ‘임마누엘’이며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들 중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일을 마치신 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지만, 이것으로 예수님의 우리와 함께 하심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임마누엘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실 때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로마서 8:9)으로 불리며, 이 영에 우리 안에 임하실 때, 우리는 영으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진정한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몸을 찢기시고 그 피를 흘리셔서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시며 우리의 영적인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주 “네 자신이 되어라(Be yourself)!” “네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Listen to your heart)!” 등의 조언을 듣습니다. 이 말들은 격려가 되기도 하며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내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많은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 또한 나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심지어 그들이 ‘내 안에’ 들어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 사람들은 내게 여러 말들을 하며 또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닐 정도입니다. 들리는 여러 소리들 중에서 어떻게 내 마음의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비록 ‘나 자신’이 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더라도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은 내 삶 자체가 여러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너 자신이 되어라” “네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 등의 조언은 실상 들리는 만큼 쓸모 있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안에 예수님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아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아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아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나에 관한 지극히 중요한 진리들이며, 나에 관한 이 진리들은 나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관계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바로 진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실 때 나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으며, 오직 예수님께서 나를 다스리실 때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어떻게 사시는 것임을 보여주는 여러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서 사는 것이라.” 빌립보서 1:20,2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또 다른 구절로 골로새서 1:27절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이 구절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며 나의 삶을 통해 높임을 받으신다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부유해지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천으로서의 나의 삶이란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려 키우듯이 내 안에 예수님을 뿌리고
키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씨앗이며, 그 씨가 흙인
내 안에 심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가복음 4:1-20)에서와 같이, 흙의 좋고 나쁨은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흙에 뿌려진 씨가 어떻게 자라고 열매를 맺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어떠함은 나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아계신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기껏해야 흙입니다. 고린도후서 4:7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은 크리스천의 삶이란 아내 없는 남편 또는 남편 없는 아내와 같습니다. 아내가 없이는, 남자는 ‘좋은 남편’은커녕 남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남편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남편 됨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그 안에 살아계시지 않은 크리스천의 삶은, 심지어 그가 겉으로 보기에 가장 헌신적인 신자라 할지라도, 전혀 가짜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선(외식 - hypocrisy)’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면 힘겨운 몸부림을 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 능력과 사랑으로 나를 압도하여 사로잡고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따라서 내 생명이 예수님으로부터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오지 않고, 또 예수님을 향하여 살지 않으면, 그 생명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요한복음 14:6), 이는 주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떨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길이요 진리요 생명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안에 계시지 않은 사람은 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와 같습니다. 가지는 모든 좋은 것들을 그것이 붙어있는 나무 줄기로부터 받아서 누리며, “오직 나무로부터만” 받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지의 정체성(what)과 상태(how)는 전적으로 “나무 줄기와의 연합”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누구이며 나의 삶이 어떠한지는 전적으로 예수님과의 연합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내 안에 계신 걸까요? 이는 내가 사랑에 빠진 누군가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심”은 두 개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과 ‘사랑’입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그의 말씀(계명)과 그의 사랑으로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말씀하시고, 더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7절);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9절).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0절) 하시고, 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2절)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입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께서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랑이 우리에게까지 미쳐서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이 신령한 친교에 접붙여졌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오직 사랑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유일한 매체이며, 당연히 예수님과 그 제자들 사이의 연합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의 사랑의 계명에 순종할 때,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당연히 끌림, 애착, 결합 등의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사랑하고 그것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의 사랑이란 붙들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붙들리고 소유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에서, 나는 나의 욕구에 따라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붙잡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고 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매우 낯설고 이상한 상황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는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은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손으로 잡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온전한 사랑에 붙들려 있을 뿐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며 능력으로 붙들고 계신 이를 온전히 신뢰하며 그 손에 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내 손을 펴고 내가 쥐고 있던 것들을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욕심과 두려움으로 세상에 있는 누군가를 또는 어떤 것으로 붙잡으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칩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하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야 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를 신뢰하며 그에게 나의 삶을 맡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실 때, 우리는 내가 그의 사랑에 붙들린바 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를 믿고 그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길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만큼 우리는 세상에 매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 견고하게 붙들릴 때, 우리는 세상을 붙들고 있는 내 손을 펴고 자유로워진 두 팔로 세상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살아계시며 신실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나의 응답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고서는 진정한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온전한 만큼 우리의 믿음도 온전해져야 합니다. 이 믿음은 내 안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자라면서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온전히 사시며, 내가 이 예수님께 온전히 죽는 것 곧 그의 뜻에 나를 온전히 순종시키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도 얻게 됩니다. 이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에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관심은 ‘바운더리(boundary)’가 아니라 ‘하트(heart)’입니다.
요절: 마가복음 14:36
믿는 크리스천들이라도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이것은 매우 당연하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이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8절에,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여쭈었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모든 계명들 –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을 잘 지켜온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남자는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켜왔다고 자랑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바운더리’이고 무엇이 ‘하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운더리란 옳고 그름, 선과 악, Yes와 No를 나누는 경계선입니다. 따라서 바운더리는 넘어서는 안될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법률이나 계명의 형식으로 존재하며, 그것을 위반했을 때는 이에 따르는 형벌이 있습니다. 바운더리는 그것을 위반할 위험과 형벌의 두려움이 감도는 긴장된 영역입니다. 이 젊은 관원은 이 바운더리를 잘 지켜왔습니다. 그는 그의 율법적인 삶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제를 바운더리에서 하트로 바꾸셨습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셨지만 사실 이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전부’입니다. 그것은 ‘하트’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이 완전히 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도전하셔서 그가 그 마음에 돈이 아닌 이웃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종교 생활로 가려져 있던 그의 속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준수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또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우월성을 앞세워, 이들은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시켰습니다. 자신들 주위에 높고 견고한 콘크리트 장벽 곧 바운더리를 쌓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 바운더리 안에 있음을 자랑했으며, ‘이방인들과 죄인들’을 외부인들(outsiders)로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들어 그들의 하트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태복음 15:8). 예수님께서는 매우 긴 경계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외식(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다음은 그 일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소경 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5-28).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많은 문제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매우 해결하기 어려운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완고한 마음(stubborn heart)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모든 여러 다른 문제들이 이 한가지 문제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붙들고 씨름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하트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이는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트 문제와 씨름하시는 하나님이 때로는 귀신과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17:9,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우리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며, 알기를 원하지도 않고, 또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죄, 곧 우리의 거짓된 마음을 드러내시고 우리로 이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의 마음은 모든 더러운 것들의 근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마태복음 15:18,19).
하트 문제는 우리를 더럽게 만들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마치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 곧 바운더리들과 겉모습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이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시며 우리의 겉모습에 절대로 속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우리는 자주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등의 표현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의 마음을 주시하시며 심지어 우리의 가장 깊은 생각조차 예수님의 눈으로부터 감출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하트로 살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앞에서 사는 것이며, 늘 주님의 눈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Martin Buber라는 철학자는 하나님을 ‘영원한 당신(Eternal Thou)’으로, 그리고 ‘절대적인 인격체(Absolute Person)’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우리 각자는 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으며, 이 관계는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오직 두 개의 절대적인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나(I)와 영원한 당신(Eternal Thou)입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은 다만 상대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상대적인 당신(relative you)’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과 맺는 관계 또한 상대적이며 일시적입니다. 오고 가며, 만나고 헤어지고, 있다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영원한 당신’은 항상 여기 ‘나’와 함께 존재하시며, 나의 가장 깊은 인격체 곧 참된 나(true I)를 상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깨어날 때, 나는 이 ‘영원한 당신’에 대해 ‘영원한 나’가 되며, 그와의 영원한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바운더리를 지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등의 명료한 지침들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트로 살 수 있을까요? 이것은 법을 지키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제가 얼마 전에 읽은 Edmund Clowney가 지은 The Unfolding Mystery: Discovering Christ in the Old Testament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헌신(devotion)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 속의 한 이야기를 이용합니다.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은 그의 산성에 있었고, 한 무리의 블레셋 군대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의 고향 마을에 있는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무척 마시고 싶어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다윗의 휘하 용사들 중 세 명이 왕의 소원을 알아챘습니다. 그들은 블레셋 군대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다윗에게로 가져왔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마시기를 거절하고 대신 하나님 앞에 부어드리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갔던 사람들의 피입니다” (사무엘하 23:13-17). 이 세 명의 용사들은 그들의 왕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분명 왕이 머물고 있는 요새에도 우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단지 왕의 바램일 뿐이며 명령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물 한 컵을 위해 죽을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왕의 마음의 소원을 위해 선을 넘었습니다. 그 선은 블레셋 군대의 방어선이며 또한 생과 사의 경계선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7:11-19에 나오는 바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 또한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외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는 중에 이 문둥병자들은 자신들의 병이 깨끗하게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은 예수님께로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맞으시며 물으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들은 약간 부당하게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돌아와 자신에게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들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이것을 간절히 원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만이 예수님의 명하신 바가 아닌 예수님의 원하시는 바를 따라서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다른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바를 행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그어진 바운더리(레위기 14:2)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 곧 주님께서 마음으로 원하시는 바를 행하는 참된 헌신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운더리를 끝으로 생각하며, “오케이!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큰 오해입니다. 바운더리는 다만 헌신, 마음, 진정한 사랑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앞서 말한 저자 Edmund Clowney는 참된 헌신은 자발적이며 그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그 소원을 들었으며 또 진심으로 이에 응답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트와 하트가 만났습니다. 진심과 진심이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자발적인 마음”으로만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쓰여진 모든 가르침들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른 일곱 명의 준수한 형들 중에서가 아니라 막내인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사무엘상 13:14, 사도행전 13:22). 그는 법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이 진리의 가정 전형적인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을 당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함으로써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님께서는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12). 성문 밖에는 누가 있습니까? 거기에는 이 거룩한 도성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죄인들, 이방인들, 문둥병자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부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성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 중 하나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으로 하자면, 예수님은 홀로 의로운 분이시며 따라서 성문 안에 머물러 계실 수 있으며 심지어 왕의 자리에 앉아야 할 분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기꺼이 저주받은 죄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신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이나 바운더리를 지키는 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곳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이곳은 바운더리를 넘어선 영역입니다. 이곳은 사랑이 다스리는 땅입니다. 이곳은 아버지와 자녀, ‘당신과 나’ 사이의 친근하고 인격적인 관계의 세계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이런 관계를 맺으시기를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원하시며 심지어 이를 위해 그 아들을 희생하시며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마음과 마음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나는 구원을 받았는가?” 또는 “나는 천국에 갈 것인가?” 등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천국에, 아버지의 집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하트를 깨우고 우리 또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섬기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