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출애굽기 3,4장)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9. 2. 25. 02:16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출애굽기 3,4

 

Norman Vincent Peale이라는 분이 쓴 긍정적 사고의 힘 (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감정을 결정하고, 또 감정이 신체의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긍정적인 생각이야말로 건강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에 가장 우선되는 요구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자신의 능력에 대한 (겸손하면서도) 정당한 자신감이 없이는 당신은 결코 성공하거나 행복할 수 없습니다 (Without a humble but reasonable confidence in your own powers you cannot be successful or happy). 이 말에 따르면, “긍정적인 생각의 근거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긍정을 강조하는 또 다른 책인 긍정의 힘 (원제목: Your Best Life Now)”에서도, 목회자인 저자는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눈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We need to see ourselves through the eyes of our Creator)”라고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는 내가 아는 ,” 내 눈으로 보는 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주인공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모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긍정적인 생각이나 자신감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는 이 엄청난 은혜가 임했는데도 그의 생각은 긍정의 날개를 달고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는 대신, 도리어 땅을 파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갈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모세로부터 배우게 되는 교훈은 부정적 사고의 힘 (The Power of Negative Thinking)”입니다.

 

사실 모세는 본래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앞의 저자들이 강조한 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보자면,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긍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세는 비록 히브리 노예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애굽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서 궁중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 최고의 문명 국가였으며, 당연히 왕자 모세는 가장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고등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7:22절은 그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본인 자신이 이런 재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애굽의 모든 보화가 다 그의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26). 심지어 모세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동족인 히브리 노예들의 구원자요 지도자요 세우셨다는 자신감까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25). 정말 그의 자신감은 더 오를 곳이 없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세의 자신감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렸습니다. 한 히브리 형제를 괴롭히는 애굽인을 때려 죽였는데, 이를 본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그들의 구원자로 추대하며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네가 뭔데 우리 가운데 왕노릇 하는 거냐?” 하며 대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세의 자신감은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그가 40년 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능력과, 그 위에 자리잡은 자신감과, 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긍정적인 생각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낯을 피해 애굽을 떠나 광야를 떠도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미디안 땅으로 가서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데릴사위가 되어 그의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당시 모세의 생각을 그의 첫째 아들의 이름에서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내 십보라로부터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습니다. 이는 타국에 거하는 객 (a sojourner in a strange land)”이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2:22). 낯선 땅에서 양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무료히 떠도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을 토로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첫 아들도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긍정의 씨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비워졌습니다. 그렇게 40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앞부분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자문했습니다.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떨기나무는 건조한 사막에서 듬성듬성 자라는 관목(bush)으로,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있어서 사도행전 7:35절에는 가시떨기나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인 모세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쓸모 없는 식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 불이 붙어 맹렬히 타는데 이 마른 관목이 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불이 붙은 떨기나무는 사실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의 가시떨기나무처럼 마르고 가시가 돋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불로 임하신 것입니다. 그의 부정한 입부정적인 마음을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냥 계속 그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평생을 그렇게 떨기나무와 같은 그와 동행하시며 놀라운 광경을 세상에 연출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 가시떨기나무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사야 5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오는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7-10절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 말을 들은 모세는 몹시 기가 막혔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심장이 뛰고 가슴이 벅찰 만큼 참으로 은혜스럽고 영광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내 그 백성들을 고통을 낱낱이 보고, 듣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자 내려오셔서 그들을 애굽인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뛸 듯이 기뻐하며, 춤과 노래로 하나님의 찬양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일성은 기쁨의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내뱉은 말은 내가 누구관대 (Who am I)” 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난 바로와 사나운 동족 히브리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40년 전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가장 젊고 용감한 때에도,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이제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왕자도 아니고, 젊은 패기와 용기와 야심도 없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광야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입이 굳어지고 말 하는 법조차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런 자신을 보면서, 모세의 입에서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모세의 부정적인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도우셔야 했습니다. “모세야, 네 안에는 네가 알지 못하는 네가 있단다. 너의 능력을 믿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주시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일 곧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인도하는 이 큰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함께 하셨음을 증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모세의 부정적인 생각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도리어 너를 보낸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따질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을 소개해야 할 것인가를 친절하고 소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하나님의 이름 곧 스스로 있는 자,”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함께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그 이름을 사용할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행하실 일들을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전히 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그를 용납하시고 이제 친히 모세의 손과 지팡이를 이용하셔서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부정적인 생각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형편없는 말주변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나님께서는 꾸욱참으시며 계속 그를 도우셨습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치리라.” 이쯤 되면 모세도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시늉이라도 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면전에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날렸습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도 참다 못하시고 결국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모세를 달래셨습니다. 모세의 친형 아론을 모세의 입을 대신할 대변인으로 붙여주시고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말씀하셨습니다. 또 지팡이를 손에 쥐어주시면서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제가 가겠나이다하고 분명히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미적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그제서야 모세는 겨우 애굽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혹시 긍정적인 생각을 믿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혹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 “하나님의 눈으로 나의 능력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모세를 만난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도 모세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고치시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모세가 가시떨기 같은 자신로부터 시선을 돌려 그에게 임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보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 모세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막으셨습니다. 물샐 틈이 없이 아주 철저하게 막으셨습니다. 모세의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절망을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 메우시고 채우셨습니다. 우리는 물론 나 자신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위대함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죄악됨나의 무익함을 깨닫고, 이런 나를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입니다. 마른 가시떨기 같은 나를 통해서라도 주님의 약속하신 바를 온전히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요한1 1:5). 이 말씀을 사람의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긍정이시며, 그에게는 부정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빛 되신 하나님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아멘이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 3:14). 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Yes)”입니다 (고린도후서 1:20).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 밝게 웃으시며,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그의 빛으로 가득 채우시는 긍정의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항상 하나님의 불이 꺼지지 않는 놀라운 떨기나무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 축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