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한 싸움
마태복음 5:38-48
구약의 사무엘서에는 다윗왕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 사무엘상 24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하자,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칭송했습니다. 이를 본 사울왕은 다윗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로 보고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미워하고 급기야는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이렇게 하여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이곳 저곳으로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사울은 다윗 일행이 엔게디 황무지라는 곳에 있다는 보고를 듣고, 3000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나섰습니다. 그 때 다윗 일행은 어떤 굴 깊은 곳에 숨어있었습니다. 다윗을 쫓다가 피곤해진 사울은 잠시 쉬기 위해 한 굴에 들어가 그곳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은 바로 다윗 일행이 숨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다윗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울이 들어와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를 없앨 수 있는 천재 일우의 기회였습니다.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주신 기회라며 사울을 죽이라고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 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심이 심히 찔림을 느끼고 물러나서 말했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이렇게 말할 뿐 아니라 그는 다른 사람들이 사울왕을 해치지 못하도록 사울왕을 보호했습니다. 만일 다윗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다윗을 위한답시고 사울왕을 죽이려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필시 다윗을 칼에 죽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무죄한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원수 사울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 경외하고 보호했습니다.
다윗과 함께 도망다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울왕은 아무 죄도 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서 온 나라를 쥐 잡듯이 뒤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병사들이 있고, 곳곳에 그의 정탐꾼들이 있어서 다윗의 동태를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사냥꾼에 쫓기는 들짐승과 같았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싸움에서, 사울은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고 다윗은 매우 불리합니다.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사울은 “법 없이 싸우는 싸움”을 하는 것이고 다윗은 “법대로 싸우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아무런 규칙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싸우는 것이고, 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규칙들을 철저하게 지키며 싸우는 것입니다.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울의 칼”이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쥐만큼의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 왕의 옷깃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그의 양심은 마치 불에 데인 듯 고통스러웠습니다. 그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 살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그 대가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스러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불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인 마태복음 5:4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말씀과 대응되는 구절인 누가복음 6:36절에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처럼 온전하라”고 하실 때 어떤 다른 것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비”에서 또는 “사랑”에서 온전하라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에서 온전하라” 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우리 아버지처럼 “온전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5:38-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이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악한 자들의 예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오른편 뺨을 칩니다. 뺨을 맞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내 속옷을 빼앗겠다고 소송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속옷과 겉옷 단 두벌의 옷을 갖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를 빼앗겠다고 재판을 하다니 얼마나 인정머리가 없습니까? 당시 로마 군인들은 길에서 아무나 붙잡아 그에게 자기의 짐을 지우고 오리를 동행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억울하고 분한 일입니다. 정말 이런 일들은 가만히 생각만 하고 있어도 분통이 터집니다. 제발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하십니다. 참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악인들의 죄”을 이길 “충분한 사랑,” “넘치는 사랑”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악인들의 죄를 덮을만한 “압도적인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의 사랑이란 이렇게 “압도적인 사랑”이 못됩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매우 약소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할만한 사람들을 사랑하기에도 꽤 부족합니다. 43,4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랑이 부족한 우리들은 늘 사람들을 둘로 나눕니다. 곧 내 이웃들과 내 원수들입니다. 그리고 원수들과는 넘을 수 없는 높은 담을 쌓고, 내 이웃들과만 오손도손 정을 나누며 오래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내 이웃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내 가족, 내 교회, 그리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 몇 명입니다. 이 작은 웅덩이에 갇혀서 겨우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아프리카 대륙은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여, 우기에는 비가 많이 오고 건기에는 비가 전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건기가 되면 큰 강들마저 말라붙어버리고, 작은 웅덩이들에 물고기들이 갇혀 겨우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사실은 사랑이 말라버린 세상에서, 몇 명의 이웃들과 함께 겨우 목숨을 연명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웅덩이에 갇힌” 사랑이 아니라 “바다같이 넓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심지어 바다보다 넓어서 가장 높은 산이라도 넉넉히 덮을 수 있는 무지막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죄라도 용서하시며, 어떤 죄인이라도 품으십니다. 예수님의 넘치는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겨우 연명하는 삶이 아니라 자유롭게 헤엄치며,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과 싸우되 사랑으로 싸워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과 싸우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다른 무기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세상을 산다는 것은 마치 “바보”와 같이 되라는 말과 같습니다. 제 큰 딸이 절 보고 “딸 바보”라고 합니다. 아빠한테 무슨 부탁을 하면 제가 잘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 대한 “바보”가 되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을 당하실 때, 밑에서 사람들이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십자가 위에 조용히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보”처럼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시험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두십니다. 내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기도 하며, 근거 없이 비방을 하기도 합니다. 이기적이어서 줄 생각은 없이 늘 “달라”고만 합니다. 무정하고 무자비합니다. 이런 사람을 참고 사랑하는 것은 마치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주먹으로 한 대 치거나 고함이라도 지르면 시원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의 죄보다 두 배나 더 큰 사랑으로 넉넉히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사랑으로만 산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더구나 모두가 자기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는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 말입니다. 시편 73편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가장 큰 시험들 중 하나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데도 늘 고난이 따르며, 어떤 사람은 이기적으로 사는데도 늘 평안하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왕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들짐승처럼 쫓기는 도망자의 삶이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이런 어려움을 극복했습니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무엘상 24:15절에서 다윗은 자기를 쫓아다니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재판장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시고, 사울의 손에서 건지실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사랑의 법”을 끝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마라톤을 경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라톤을 정해진 경로를 따라 달리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빨리 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더 빨리 가겠다고 지름길을 택하면, 그는 바로 실격입니다. 아무리 기록이 좋아도 심판은 그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법이 없는 경쟁”을 합니다. 지름길로 빠지고, 옆에 달리는 사람을 넘어뜨리고, 심지어 경쟁자들이 다른 길로 빠지도록 유도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재판관이신 하나님 눈에 이들은 실격입니다. 이미 “진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불리한 싸움”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떠한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만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으로 세상의 죄를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우리가 온전해지며 또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우리의 미움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 가슴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세상에 나가며, 우리의 지경을 넓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원수를 내 가슴에 품고 사랑함으로, 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