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14-18)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14-18
오늘은 “진리”에 대해서, 그리고 은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진리(truth)란 무엇일까요? 진리란 실재(reality)나 사실(fact)에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의 말씀”(에베소서 1:13)이라고 하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신뢰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로 해서 상황을 올바로 파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고, 장래 일을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거짓된 정보를 기초로 일을 하거나 인생을 산다면 큰 낭패를 당할 것이며,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라는 말은 대개 중대한 문제에 사용됩니다. 곧 진리란 우리의 삶의 행복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갖고 알고 싶어하는 사실들을 말합니다. 진리는 오늘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음식을 먹을까 하는 사소한 문제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치병에 걸린 환자는 자신이 얼마 동안이나 더 살 수 있을 것인지를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또 죄를 짓고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판사가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묻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같이 딸을 둔 부모들은 자녀들이 만나서 결혼할 남자가 어떤 사람일까 매우 궁금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 곧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좀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또 어려운 일을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정말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궁극적인 실재 (ultimate reality)”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시는 진리가 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포인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실재”가 되십니까? 이는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말씀합니다. 또 마태복음 10: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4:10b절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하며, 또 11b-12절은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며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 사람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심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사건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죄를 짓고 재판을 기다리는 죄인은 밤낮으로 그가 재판관을 대면하는 순간을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재판관의 권세”로부터 건져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듣기 좋은 위로의 말이나 희망의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재”도 아니며 “진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실재는 그 재판관입니다. 이는 오직 그 재판관의 심판이 그의 생사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재판관이 “유죄”라고 하면 그는 벌을 받는 것이고, 그 재판관이 “무죄”라고 하면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마도 그에게 이 재판관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두려움 가운데 심판의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궁극적 실재”이시며,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가 되십니다. 이것은 우리 사람들에게는 한편으로는 “절망”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망”이기도 합니다. 절망스럽게도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율법”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대신 “율법”을 주셨습니다. 물론 “율법”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고 목이 곧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늘 “두려운 형벌”과 함께 옵니다. 율법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위기 24:16) 하며, 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애굽기 21:15) 합니다. 율법이 하는 일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법이 “죄로 심히 죄가 되게 함”이라고 설명합니다 (로마서 7:13).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입니다 (로마서 3:19). 율법은 사람들의 죄악된 민 낯을 드러내고, 정죄하고, 저주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멀리하게 만듭니다. 오직 죄 아래 갇혀서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무서운 삶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의 열쇠를 쥐고 계시지만, 우리는 정죄하는 율법에 갇혀 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도, 또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을 방법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절망”입니다.
하지만 여기 “소망”의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곧 우리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실 수 있을까요? 18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 관한 진리를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내실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품 속에 계시던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이 “독생하신 하나님” 곧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 사람과 같이 육체를 입으셨지만 예수님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과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다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여 아버지(하나님)를 보여주옵소서” 하는 제자 빌립의 요구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9-11).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것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듯이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심은 우리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로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무서운 재판장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두려움의 벽”이 사라지고, 우리가 은혜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히브리서 4: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제가 생각할 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죄인인 사람이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사람들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께 대한 좋은 말을 들어도 귀를 닫고 마음을 닫으며 오직 “엄하고 무서운 하나님”만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9:21). 하지만 이 어려운 일을 예수님께서는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은혜와 긍휼이 넘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오직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곧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아주 신기하게도 우리 속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가시고, 대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물밀듯이 밀려오며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담대함이 생기게 됩니다.
“죄”는 물론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가 “좋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대해 담대함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두렵게 만들던 “죄”가 반대로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한 “죄인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는 동네에서 “죄인”으로 불려졌으며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당연히 하나님도 두려워하고 멀리 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녀가 예수님께 나아와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또 그녀가 가져온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나아와 그 몸을 만지는 여자를 보면서 사람들은 심히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던 죄인 여자가 이제 많은 사람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 나아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활짝 표현하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죄인 여자의 놀라운 변화의 이유를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47). 이 여자가 이렇게 담대하게 된 것은 그녀의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많은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은 그녀의 많은 죄를 덮고도 남을 만큼 충만했습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자신의 많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많은 긍휼”이었습니다. “자신의 많은 죄”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어둡고, 절망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창피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많은 긍휼”이 그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녀의 눈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밝고 아름다우며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그녀를 조롱하고 저주하던 사람들까지도 그녀의 눈에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담대하고 자유로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손끝에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침을 느꼈습니다. 이전에는 스스로 더럽게 느껴졌던 그 손으로 이제는 주님을 씻고 만지기까지 하면서 그녀는 정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많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많은 죄”가 이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을 그녀로 알게 한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입니다.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은혜는 그 끝이 없을 만큼 넓고 높고 깊습니다. 이 은혜의 물을 타고 가면 긍휼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우리의 인자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죄로 어두워진 눈을 밝히고, 우리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심장에 담대함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 예수님의 긍휼로 인해 죄에 종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고상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을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어떤 축복도 이 은혜를 대신할 수 없으며, 세상에서 겪는 어떤 고난도 이 은혜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며 그 사랑 안에 온전히 잠기는 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