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1:21-2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9. 6. 03:58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1:21-28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세상에 나가 사람들 가운데 처음 하신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처음 하신 일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신 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을 선포하실 , 가르치심에 대한 가지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더러운 귀신이 비명을 지르며 쫓겨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광경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세 있는 교훈 대해 놀라워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제가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가지 포인트는 첫째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신 일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사람들에게 권세 있는 교훈으로 들렸는가에 관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버나움이라는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 해안가에 자리잡은 마을이며, 예수님 당시 인구가 1500여명 정도로 당시 기준으로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가버나움은 남북을 잇는 간선 도로 상에 위치해 있어서 상업적으로도 번성했으며, 세금을 걷는 세관과 로마군 주둔 캠프도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유대인의 회당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가버나움은 갈릴리와 주변 지역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북쪽 갈릴리 지방에 계실 때는 주로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서, 그리고 남쪽 유다 지방에 계실 때는 주로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21 말씀입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 여기서 회당이란 그대로 함께 모이는 장소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원어로는 “Synagogue”라고 하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본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가장 경건하고 의미 있는 신앙 행위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직 예루살렘 곳에만 있는 성전을 자주 있는 것이 아니어서, 지방 곳곳에 회당 세우고 그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명기 12 말씀에 따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복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 (신명기 12:12a)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12:18), …… “만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멀거든 내가 네게 명한 대로 너는 여호와의 주신 우양을 잡아 너의 성에서 네가 무릇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먹되 ……” (12:21) 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예루살렘 성과 안에 세워진 성전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거하는 성에서 함께 모여 먹으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회당이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성전과 회당의 기능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호와 앞에 모여서 주신 복을 인하여 함께 먹으며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이름을 찬송하는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회당 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있어서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사람에게서 나오라하시자 더러운 귀신은 사람을 마지막으로 심하게 괴롭히고는 소리를 지르며 쫓겨났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성전과 회당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호와 앞에 모여서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이름을 찬송하는 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곳은 가장 거룩한 ,” 지성소(至聖所)입니다. 그런데 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있었습니다. 쫓겨나가는 귀신이 거세게 저항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더러운 귀신은 매우 오랫동안 이 회당 이 사람을 자신의 집처럼 여기며 편안하게 그곳에 거주했던 같습니다. 말하자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오히려 더러운 귀신의 소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회당과 사람을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의 비슷한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입니다 (마태복음 21:10-17; 마가복음 11:15-18; 누가복음 19:45-47; 요한복음 2:14-16).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시며, 이사야서 56:7 말씀을 인용하여 저희들을 책망하셨습니다: “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마태복음 21:13).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라고 부르시며, 그곳이 기도하는 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자녀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 그곳을 강도의 소굴 만들어놓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에 심히 분노하시고 장사꾼들을 성전 밖으로 쫓아내셨습니다.

 

회당이 더러운 귀신의 되고, 성전이 강도의 소굴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교회 거룩한 곳이며, 더러운 영들이나 악한 사람들이 거하지 못하는 안전한 곳이라고 안심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만큼, 사단 마귀 또한 성전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며 그곳에서 사람들의 예배를 받기를 원합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마귀의 시험에서 드러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며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마태복음 4:8-9). 마귀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그의 경배를 받고자 유혹했습니다. 이런 마귀의 시험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3:2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하게 하려 하리라.” 말씀들을 보자면, “성전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곳이기도 하지만, 사단 마귀가 끊임없이 침입해 들어오는 치열한 영적 싸움터이기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회복하시기 위해서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들어가셔서 가르치신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사실 성전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사단의 공격에 대해 더욱 강하고 견고한 성전 짓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9-22).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사람들이 교훈을 듣고 놀랐습니다. 이는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내어쫓으시자 사람들은 더욱 놀라며 외쳤습니다. “권세 있는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 순종하는도다.”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들을 쫓아내며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권세 있는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권세가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아들 하시는 말씀이니 당연히 권세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서기관들 성경책을 펴놓고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텐데, 도대체 어떤 점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그렇게 확연히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전혀 다른 말씀 가르치신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같습니다. 마태복음 23:2-3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하는 바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 말씀에서 예수님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라 하십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내용 면에서는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님을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교훈은 그렇게 새롭고 유별나게 권세가 있는 것일까요? 정말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민을 하던 가지 생각이 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20여년 전에 많은 인기를 모았던 웹툰(인터넷에 연재되는 만화) 하나인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라는 제목의 만화 안에 있던 장면입니다. 이 만화는 30세의 회사원인 김연우와 18세의 여고생인 한수영이라는 등장 인물 사이의 잔잔한 사랑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남자 연우는 고등학생 시절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친구가 그에게 담배 권합니다. 괴로움을 이기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였습니다. 매운 담배 연기를 마시며 연우는 문득 자신이 진짜로 혼자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잣말로 이렇게 넋두리를 합니다. “담배 …… 엄마 아빠가 알면  혼내실텐데 …… 나는 이제 그냥 담배를   있구나!”

연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명문대학교에 합격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는  때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부모님이 원하던 명문대였는데 저는 이제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외로웠습니다.” 

 

연우는 군대도 갔다 오고 대기업에 취직도 했지만 그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가고,  오래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연우는 그렇게 1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담배를 끊을 이유가 생겼습니다. 이는 그의 곁에 담배를 많이 핀다고 걱정해 주는 사람 생겼기 때문입니다. 수영은 자신을 기다리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는 연우를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기다리느라 담배 피는 거죠? 그러다가 담배 너무 많이 피겠어요. 담배 많이  피게 해줄께요. 그만 피워요 담배!” 제가 젊었을   년간 담배를 많이 피워서  압니다. 10 넘게 피워  담배를 갑자기 끊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요. 하지만 18 어린 소녀의 그만 피워요 담배!” 라는 말에는 엄마 아빠의  만큼이나 연우의 오래된 잘못을 고칠 힘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녀가 연우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원했기 때문입니다.

 권세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권세는 사랑에서 옵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진심으로 함께 하는 입니다. 연우에게 엄마 아빠는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을 이유였으며, 그가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교에 입학할 이유였습니다. 엄마 아빠의 사랑 안에서 연우는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자녀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엄마 아빠의 말과 생각과 뜻은 연우에게 항상 절대적인 권세 다가왔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에게 부모님의 뜻은 그대로 나의 되었습니다. 그는 ?”라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엄마 아빠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이유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길은 언제나 빛처럼 분명했습니다. 엄마 아빠의 사랑의 안에서 연우가 담배를 핀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생각조차도 없는 불가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되었을 , 그를 붙들고 인도해주던 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저항 없이 담배를 받아들였으며, 마치 좀비 (살아있는 시체)”처럼 의식 없이 움직였습니다. 그의 영혼은 어둠 속에 갇히고 귀신들의 놀이터 되고 말았습니다. 그를 어둠에서 꺼낸 것은 역시 사랑입니다. 그와 진심으로 함께 하고,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의 건강과 행복을 간절히 바라는 어떤 사람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권세가 있어서 연우를 깨우고,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그의 삶을 행복하고 건강한 길로 이끌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간절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사랑 이야기에서 우리는 엄마 아빠의 사랑이나 순수한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 훨씬 순결하고 애틋하며 헌신적입니다. 요한1 3:1a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연우는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엄마 아빠를 잊게 만들 만큼의 어떠한 사랑 그에게 있는 다른 엄마 아빠 있을 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일이 가능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연인 사이의 애틋한 사랑을 ~~ 능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권세로 능히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사로잡으실 있습니다. 어떠한 사랑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1 4:10).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요한1 3:8),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명랑하고 착하고 부지런하던 아들이 어두운 골방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엄마 아빠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요? 만일 연우의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셨다면 아들의 회복을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서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잃고 고아처럼 피폐한 영혼들을 회복시키시는 사랑의 빛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사시며 사람들을 섬기신 일에 대해 마태복음 4:16절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 예수님은 우리를 환하게 비추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며, 우리 자신이 또한 두려움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심히 사랑하셔서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의 권세가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권세는 진심으로 함께 하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신 사랑은 다름이 아니고 그가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신 (성육신)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사단 마귀를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승리 주셨습니다. 승리는 사람의 승리이며, “육체의 승리이며, “우리의 승리입니다.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마귀를 이길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더러운 귀신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회당이 마치 자기 집인 눌러 앉아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귀신은 두려움에 떨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귀신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심을 알아보고 이를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도록 하셨습니다. 1:34절에서도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시며 귀신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사단 마귀를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런 자신의 정체를 숨기셨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육체의 약함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셔서 온갖 시험들을 이기시고 마침내 우리 죄인들을 위한 화목 제물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약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이로써 사단 마귀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 가진 영적 권세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육체는 귀신의 놀이터가 아니라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양드리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몸으로 새로 지으신 성전입니다. 우리에게 같은 사랑을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놀라우신 은혜를 찬양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