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2:13-1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10. 18. 03:4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2:13-17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신 일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완전한 구속(perfect redemption)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속죄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12).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려 이루신 속죄는 “단번에” 완성된 “영원한 속죄”입니다. 이것으로써 “죄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가 각 개인들, 곧 각 “죄인들”에게 받아들여져 그 효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들이 백신 주사를 맞고 있습니다.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 그만큼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이 그 백신을 맞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이 은혜를 완성했지만, 이것을 각 개인이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사랑하며 늘 마음으로 입으로 읊조리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 아들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대속의 은혜의 효력은 오직 “저를 믿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흥미롭게도 “저를 믿는 자”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단수(singular)”로 되어 있습니다. 곧 “저를 믿는 자들”이 아니고 “저를 믿는 자”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우주적(universal)”이지만, 동시에 “개인적(personal)”입니다. 이 구원의 개별성(individuality)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24:40-41). 예수님의 은혜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오직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개인들에게만 유효합니다. 이 은혜가 어떻게 각 개인에게 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인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일어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한 사람의 영혼에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중심 주제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레위”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금을 걷는 세리(tax collector)였습니다. 신약 성경의 복음서에서 “세리”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집에 모셔 영접하고, 또 자신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며, 불의하게 거둔 세금을 4배나 갚겠다고 서원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비유들 중 하나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누가복음 18:9-14)에 나오는 세리는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게,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세리들은 “죄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세리와 죄인들” 또는 “죄인과 세리들”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15, 16). 아마도 세리들은 죄인들 중에서도 특별히 질이 나빠서 따로 구분해야 할 사람들로 취급된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여러 식민지들을 통치하면서 세금을 걷기 위해 현지인들을 고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현지 사정에 밝은 이들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세금을 걷기 위해서였습니다. 레위와 같은 유대인 세리들도 이와 같이 로마 제국을 위해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정해진 세금 외에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울 돈을 추가로 징수했습니다. 자신들의 땅을 침략하고 압제하는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동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이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저는 가끔 주차 위반으로 벌금 티켓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돈이면 가족들과 근사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비싼 가격 때문에 선뜻 사기를 망설이는 물건을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 티켓을 준 사람이 매우 미워집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식구들의 저녁 식탁에 올릴 빵을 사기 위해서 하루 종일 뼈빠지게 일을 해서 번 금쪽같은 동전 한 닢을 세리의 무자비한 손에 빼앗길 때, 사람들의 마음을 찢어지게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만큼 세리들에 대한 사람들의 미움 또한 깊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며, 부정하게 여겨 한 지붕 아래 있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들은 돈을 위해 동족들을 배신하고 짐승같은 이방인들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정말 세리는 유대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그리고 우리 눈으로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나가시자 다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그러나 레위는 곧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또 레위의 즉각적인 응답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특히 레위가 죄인 중의 죄인인 세리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리 레위의 마음 속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곧 순종하여 따른 것을 볼 때,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간절히 기다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그의 영혼에 내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었습니다. 레위는 즉시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치 덫에 걸린 양이 목자의 도움을 받아 그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레위는 세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누가복음 5:28) 급히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렇게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죄는 “낙인(stigma)”입니다. 죄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옭아매고, 짓누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듭니다. 죄를 짓고 교도소를 갔다 오게 되면, 사람들은 그를 “전과자”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다른 아름다운 모습들이 많이 있을지라도, 그는 평생 “전과자”라는 낙인을 지닌 채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낙인은 그의 다른 모든 아름다움을 다 망가뜨릴 만큼 막강한 파괴력이 있습니다. 레위의 삶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좋은 이름이 있습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조화,” “연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29:34). 아마도 그의 아버지 알패오는 아들이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화평하게 하는 선한 영향력의 사람으로 크기를 기도하며 그런 이름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레위”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를 “죄인 세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심지어 “선한 일을 할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밀어내며 “죄인 세리 주제에 ……” 하며 따돌렸을 것입니다. 그가 앉아있을 자리는 “세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레위에게는 그런 기쁨을 누릴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죄인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늘도 이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세관에 앉아서 사람들로부터 돈을 거두었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은 서로 웃으면서 얘기를 하다가도,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와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그를 외면하고 침을 뱉으며 먼 길로 돌아갔습니다. 레위는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아마도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닐까 좌우를 둘러보았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은 나를 빤히 보고 계셨으며, 틀림없이 예수님은 나를 향해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세리”가 아니라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게 볼 일이 있어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처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레위는 즉시 일어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레위는 “죄인 세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좇음으로 그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이름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하루 종일 세관에 앉아 돈을 좇는 일”을 하다가, 이제 “매일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죄인 세리”라는 낙인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이름 대신 “세리”라고 부르며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하지만 레위에게는 이제 이 부끄러운 이름을 이겨내고 심지어 그것을 깨끗이 지워내고 잊어버릴 수 있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새로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세리 레위의 갱생은 죽은 자가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그의 영혼을 뒤덮고 죽도록 무겁게 짓누르던 죄의 짐이 벗겨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환한 빛이 밝고 따스하게 그를 감쌌습니다. 그냥 매우 행복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열고 자신의 “죄인 친구들”을 모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평생 처음으로 천국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24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는 세리처럼 나쁜 죄인은 아니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스스로를 의롭고 착하다고 자부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16절 말씀에,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레위의 친구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서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이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에 대하여 매우 높은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서 “죄인들”을 정죄하고, 심지어 겸손히 죄인들을 섬기시는 예수님까지도 판단했습니다. 사실은 이들 또한 레위 못지않게 나쁜 죄인들입니다. 그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예레미야 2:13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두 가지 죄를 언급하십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생수”나 “물”은 우리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고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필수 요소입니다. 그것은 “의(righteousness)”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의는 어디서 올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생수의 근원”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의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버지의 인자하신 은혜와 사랑이 곧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리 레위는 “돈”이 자신의 삶에 생명과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 대신 돈이라는 “스스로 판 웅덩이”를 의지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고 번듯하게 할 물을 긷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으로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행복하기는커녕 그는 비참하고 메말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이 “스스로 판 웅덩이”를 즉시 버리고 다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신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여 사는 대신,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며, 심지어 이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보여주신 은혜이십니다. 하지만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이 은혜를 받는 대신 여전히 “자기 의(self-righteousness)”라는 스스로 판 웅덩이를 고집하였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위에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그 “두 가지 악”을 행하고 있는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다 죄인이며, 매일 살면서 크고 작은 잘못들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부르시고 인도하심으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에 힘입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나의 의가 되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오직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애통해하는 가난한 마음 속에 임합니다. 어두운 죽음의 무덤 속에 갇혀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자에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었을 때,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죄이며, 반대로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자기 의”를 고집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더 큰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 은혜를 의지하여 살 때, 우리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빛 가운데 더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죄인 됨을 더욱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더욱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이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의가 없으며 오직 죄로 죽을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실 누구보다도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합니다 (빌립보서 3:5-6).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로 바울은 이런 것들이 한낱 “배설물”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죄인, 곧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입니다 (디모데전서 1:15). 그는 이렇게 탄식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디모데전서 1:14).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 영혼 속에 일어나는 은혜로운 변화입니다. 내가 죄인 됨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며, 동시에 예수님의 은혜가 더욱 깊이 내 영혼 속에 차고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의 삶에서 알 수 있듯이 “죄”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짐입니다. 시편 38:4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셔서 절대로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정죄하는 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매일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또한 매일 얽매이기 쉬운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힘써 예수님을 좇는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