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스스로 자라는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26-29)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1. 17. 02:05
스스로 자라는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26-29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대한 지식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1+1=2”와 같은 식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이성(reasoning)”의 영역이 아니고, “믿음(believing)”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공부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를 가리켜 “비밀”이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4:11). 또 예수님은 천국을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시며 (마태복음 13:44),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그것이 이미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7:20-21).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와 가까이 혹은 우리 안에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비밀처럼 감추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이와 같은 속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두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스스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에서 거듭 언급되는 바 “씨”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땅”은 그 복음을 마음에 받아 간직하고 있는 우리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3:6-9절 말씀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두 가지 은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밭”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며 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대상”은 그 밭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곧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밭”으로서의 성도란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을 씨로 받아 이를 마음에 간직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흙”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흙은 우리의 인생 여정을 요약하는 한 마디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3:19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와 같이 흙은 연약함, 허무함,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가 “흙 (Adamah)”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 “흙”이 “하나님의 밭”이 되었습니다. 이는 흙이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씨앗으로 그 안에 간직하며,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으시기 위해 일하시는 일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질 때, 이미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밭이 농부의 눈에 소중한 것은 그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짓고 열매를 수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눈에 소중한 것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이 뿌려지고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만 “육체”로 산다면, 그것의 가장 화려한 부와 권세와 영광도 하나님의 눈에는 먼지처럼 흩어질 “흙”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7절 말씀입니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그것이 “스스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씨는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self-contained)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씨가 땅 속에 뿌려지면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내고,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매우 신기한 것입니다. 저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룩한 오늘날의 뛰어난 과학과 기술로도 “생명의 신비”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생명의 현상들” 곧 먹고 호흡하며, 성장하고 결실하며, 번식하고 유전하는 현상들만을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오직 씨 안에 담겨져 있는 “비밀한 지식”을 따라서 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신비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지으실 때, 특히 “씨”에 대한 내용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11-12절은 하나님께서 식물들을 지으신 일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채소들과 열매 맺는 나무들을 모두 “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창세기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이 말씀에 따르자면, 하나님께서 식물들을 만드셨다고 하기보다는 그것들의 씨를 만드셔서 땅 속에 두셨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스스로” 자라고 번식함으로 풍요로운 세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지으실 때 “씨 가진 채소와 나무”를 만드신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생명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스스로 자라는 씨”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씨는 “그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그 말씀에 더하거나 빼거나 바꾸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흙인 우리가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온전한 태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8).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할 때, 과연 그 말씀이 내 안에서 기지개를 켜며 살아나서 나의 삶을 영화롭고 풍요롭게 변화시켜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5:20; 빌립보서 2:16). 우리가 이 생명의 말씀을 받아 지키며 그것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메마른 사막과 같던 나의 삶이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넘쳐 흐르는 아름다운 생명의 땅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스스로 자라는” 또는 “그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이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자주 “어떻게 (How)?”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늘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설명이 없을 경우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몸이 늙어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오셔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라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창세기 18:13).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하며 반문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4). 또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6:51-52). 사도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전하자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사는가?" 힐문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5).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며 의문을 갖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은 우리의 경험상 불가능한 일이거나 우리의 이해력으로 불가해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하신 말씀”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는 “어떻게?” 하며 반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며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27절에서도,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만 오가며, 자고 깨며 씨가 자라는 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이며,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붙들고 계신 세계이며,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세계는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믿음의 세계”입니다.사람들이 자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하고 질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처럼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며 믿은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어느 날 아침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이미 밤새 그물질을 하고 나서 이제 집에 돌아가려고 그물을 씻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시몬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지난 밤 내내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시몬의 경험이고 지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실 때, 시몬은 “선생님, 최소한 이 바다에 대해서는 제가 당신보다 더 잘 압니다. 지금은 고기 잡을 때가 아닙니다” 하고 그 말씀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대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수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물고기들이 다니는 길목을 미리 아시고 시몬을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고기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곧 모든 것이 말씀 안에 있으며, 말씀에 따라 움직이며,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시몬은 많은 물고기를 잡은 후에 “아 여기가 물고기들이 잘 잡히는 곳이구나!” 하며 기쁨의 탄성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사실에 놀라며,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는 놀라고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무서워 말라” 하시고 또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시몬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는 말씀 또한 베드로의 인생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베드로의 삶 속에 임하고 자라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이 된 것은 베드로가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씨가 때를 따라 성장하며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씨가 열매를 맺기까지는 싹이 나고, 이삭이 패고, 또 속이 차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때”를 따라 행하십니다. 앞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 일이 “어떻게 (How)”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 사람들은 “언제 (When)” 그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조바심을 갖고 질문합니다. 사람들은 늘 조급해하며 “지금 당장” 그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누가복음 19:11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또 사도행전 1:6절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대신,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24:14). 어떻게 보면 제자들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렇게 평생 주님의 일을 하면서 기다리다가 “그 때”를 보지 못하고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망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또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죽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새 몸으로 다시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대상”이며 동시에 “소망의 대상”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사는 시간은 “지금 당장”이 아니고 “먼 미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6-18).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 하나님의 상속자인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장래의 소망과 비교하면,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금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래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오직 현재를 위해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흙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바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대상”이며 “소망의 대상”입니다. 그 안에는 “스스로 자라는” 능력이 숨겨져 있으며,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숨겨진 보배와 같습니다. 믿고 바라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숨겨진 “약속”이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믿음의 눈으로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축복된 삶의 비결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비결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축복된 “하나님의 밭”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