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 – 거짓 평안과 참된 평안 (마가복음 4:35-4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2. 6. 12:29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 – 거짓 평안과 참된 평안
마가복음 4:35-41
오늘은 예수님께서 거센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신 사건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저어 바다 ( 갈릴리 호수이지만 “ 갈릴리 바다 ”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 를 건너던 도중에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 자연재해나 천재지변 같은 사태는 사람이 예방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일이어서 우리는 이것들을 “ 불가항력 ( 不可抗力 , force majeure, Act of God)” 이라고 부릅니다 . 이런 재해들은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 그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런 재해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장소로부터 가능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 이런 의미에서 보면 ,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행동들은 이런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십니다 . 광풍이 일어나 배에 물이 차고 가라앉을 위험한 상황인데도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평안히 잠을 주무십니다 . 그리고 잠에서 깨신 주님은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십니다 . 그리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한 말씀을 하십니다 . “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 예수님께서 보이신 행동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참으로 “ 믿음이란 무엇인가 ?” 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돌아보게 합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 불가항력의 재난 ” 앞에서 평안하며 , “ 죽음의 두려움 ” 을 잠잠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 우리는 어떻게 이런 믿음의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
35 절 말씀입니다 . “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바닷가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후 날이 저물자 제자들에게 “ 저편으로 건너가자 ” 하셨습니다 . 여기서 “ 저편 ” 이란 마가복음 5:1 절에 언급된 바 “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 ” 을 말합니다 . 5 장 말씀에 따르면 , 예수님 일행이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만난 것은 ‘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과 ‘ 큰 돼지떼 ’ 와 그리고 그 돼지떼를 돌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 무덤 ’ 이나 ‘ 더러운 귀신 ’ 같은 말들을 생각하면 별로 가고 싶지 않는 곳입니다 . 또 이곳에는 돼지 고기를 즐겨먹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유대인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돼지떼가 매우 낯설고 이상한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 또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바다 여행을 시작한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다고 합니다 . 아마도 예수님 일행이 바다를 건너는 때는 한밤중이었을 것입니다 . 갈릴리 바다는 주변의 고원지대 ( 오늘날 ‘ 골란 고원 (Golan Heights)’ 이라고 불리는 지대 ) 로부터 찬 공기가 해수면으로 내려오면서 자주 돌풍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 육지와 바다 수면의 온도 차이가 더욱 커지는 밤에 발생하는 바람은 훨씬 더 격렬하고 위험했을 것입니다 . 요약하자면 , 예수님께서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 더러운 귀신들린 어떤 사람을 만나시기 위해서 한 밤중에 거센 폭풍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바다를 항해하여 이방인들이 사는 낯선 땅으로 건너가시는 것입니다 . 이 자체로만 놓고 보면 거의 ‘ 공포영화 ’ 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 매우 깊은 ‘ 어두움 ,’ ‘ 두려움 ,’ ‘ 죽음 ’ 의 그림자가 깔려 있습니다 . 컴컴한 저편에서 갑자기 어떤 무서운 것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가득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마치 소풍을 떠나듯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
“ 저편 (the other side)” 은 미지의 땅이며 , 그만큼 위험한 곳입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었지만 , 아마도 바다를 건너 저편으로 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마을에서 가까운 바다로 나아가 고기를 잡고 ,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곧바로 육지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 그들은 바다에서 어디까지 나가면 안전하고 , 어디부터는 위험한 곳인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 그리고 안전한 “ 이편 (this side)” 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잡을 수 있는 만큼의 고기에 만족하며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했을 것입니다 .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각자에게는 “ 내 집 (home)” 처럼 느껴지는 익숙하고 편안한 “ 이편 ” 의 영역이 있습니다 . 다정한 가족들 ,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고 ,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까이 있어서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 또 그 안에서 필요한 만큼의 돈도 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주 그의 사람들을 “ 이편 ” 에서 “ 저편 ” 으로 옮기십니다 .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 창세기 1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에게 “ 복 ” 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복은 그가 머물고 있는 “ 본토 친척 아비 집 ”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며 , 그 복을 받기 위해 그가 지금 머물고 있는 땅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무엇일까요 ? 그것은 바로 “ 하나님 자신 ” 입니다 .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복의 근원이 되심을 그에게 알게 하시고자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 ” 곧 “ 이편 ” 을 떠나 “ 내가 네게 지시할 땅 ” 곧 “ 저편 ” 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아가 그곳에서 “ 나그네 ” 와 같이 살았습니다 .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낯선 땅에서 아브라함이 의지할 바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 이 나그네의 여정 속에서 그는 매일 매일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 이편 ” 이 되셨습니다 .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 저편으로 가는 항해 중에 예수님은 “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 (38 절 ). 아마도 항해의 처음에는 바다도 잔잔하고 , 바람도 순풍이었었나봅니다 . 더욱이 , 제자들은 뱃일이 몸에 밴 어부들이었습니다 . 최소한 바다에 대해서만큼은 ,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잠들어 계셨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주님의 “ 평안함 ” 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 다른 한 편으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함께 계심을 잊고 있었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 예수님 없이도 , 자신들의 경험과 힘과 지혜만으로도 아무 문제 없이 이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하지만 이들은 곧 한계에 부딪힙니다 . 큰 광풍이 일고 물이 배 위로 넘쳐흘러 들어와 빠져죽게 된 것입니다 . 이들은 그제서야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비명을 지릅니다 . “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38 절 ).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재우시고 , 그런 다음에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며 그들의 두려움을 잠재우십니다 .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41 절 ) 에서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고 주님을 심히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 “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 이제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고 , 또 “ 심히 두려운 분 ” 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만큼 , 바람과 파도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갖는 평안이며 , 참된 평안입니다 .
우리 사람들은 모두 “ 평안 ” 을 원하고 도모합니다 . 인사도 “ 평안하신지요 ?” 묻고 , 또 “ 평안하십시오 ” 기원합니다 . 이렇게 간절히 평안함을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을 얻기가 쉽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 그것을 얻는다 해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 늘 마음 깊은 곳에는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 병원 응급실 직원들을 인터뷰하는 한 TV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 이들에게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 금기어 ” 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 그들은 “ 오늘 한가하네요 !” 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응급 환자가 없어서 응급실이 조용할 때 “ 오늘은 한가하네요 !” 하면서 여유를 즐기려고 다리를 뻗으면 거의 영락없이 환자들이 갑자기 밀려들어 삽시간에 응급실이 아수라장이 된다고 합니다 . 항상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 우리 사람들이 갖는 “ 평안 ” 이 얼마나 불안하고 부서지기 쉬운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 그것은 마치 “ 살얼음판 ” 과 같습니다 .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형편도 비슷합니다 .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한밤중입니다 . 언제 광풍이 내려칠지 모르는 바다를 , 작은 조각배를 의지하여 건너고 있습니다 . 그들이 가는 곳은 낯선 땅이며 그곳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께서 잠들어 계신다는 것입니다 .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함께 계심을 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 그만큼 “ 평안하다 ” 는 말이기도 합니다 . 모든 일이 “ 순풍에 돛 단 듯이 ” 잘 되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 하지만 이 “ 평안 ” 은 위험한 평안입니다 . 이 평안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잠들어 계신 평안입니다 . 이 평안은 오직 자신들의 경험과 힘과 지혜를 의지한 평안입니다 . 그래서 이 평안은 “ 살얼음판 ” 과 같은 평안입니다 . 오히려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평안입니다 .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살얼음판과 같은 평안을 지키고 그 안에서 살려고 노력합니다 .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 보이는 것들 ” 을 의지합니다 . 곧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 ” 으로 평안을 얻기보다는 , 보이는 것들을 내 손에 움켜쥐고 그것들에 안주함으로써 평안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런 노력의 결국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또 그들이 그렇게 애써 지키려던 살얼음판 같은 평안도 곧 잃게 됩니다 . 평안은커녕 가장 절망적인 불안의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 우리의 신앙도 사실은 이렇게 우리가 평안을 얻기 위해 의지하는 “ 보이는 것들 ”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어떤 민족들에 비해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런데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 그 말씀을 듣고 , 그 뜻에 순종하는 대신 , 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인 자산들 , 경험들 , 전통들을 따라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 그들에게는 성전이 있고 , 모세의 율법이 있고 , 장로들의 규례가 있었습니다 . 할례를 행하고 , 절기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갔다 ” 고 하시며 , “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한다 ” 고 한탄하십니다 ( 예레미야 8:7). 물론 이스라엘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섬긴다고 하는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서기관들을 “ 거짓 붓 (lying pen)” 이라고 부르시며 (8:8), 그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다 거짓을 행한다고 책망하십니다 (8:10). 이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 대신 “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 하나 그들에게 평강이 없습니다 (8:11). “ 심상히 ” 란 “ 대수롭지 않게 ,” “ 별 일이 아닌 것처럼 ” 이란 뜻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과 이로 인해 그들에게 생긴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무시하고 , 별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 “ 평안 ” 을 외칩니다 . 하지만 이것은 “ 거짓 평안 ” 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그들이 붙들고 있는 이 “ 거짓 평안 ” 을 깨뜨리셔야 했습니다 .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 이편 ” 곧 가나안 땅에서 강 “ 저편 ” 곧 바벨론 땅으로 옮기셨습니다 . 거짓 선지자들을 죽이시고 , 성전을 허물어뜨리시고 , 사람들이 살던 땅을 적막한 광야로 만드셨습니다 .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 이는 이들에게 “ 참된 평안 ” 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 예레미야 29:11 절 말씀입니다 .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 이 말씀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 “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 ” 곧 하나님의 생각이 “ 평안 ” 이라고 하십니다 .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평안의 근본이 다른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생각 ” 곧 “ 하나님의 마음 ” 임을 말해줍니다 .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그들의 평화의 근본이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잊은 채 , 세상의 보이는 “ 거짓 평화 ” 에 속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깨우셔야 했습니다 .
오늘 본문에 나오는 “ 광풍 훈련 ”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의 눈으로 이 사건을 보면 , 광풍을 만난 제자들이 잠들어 계신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청하고 , 이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재우시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 이것이 이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 예수님 없는 거짓 평안 ” 에서 “ 예수님 안에 있는 참된 평안 ” 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 이 광풍 훈련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재우신 것이 아닙니다 . 이 광풍 훈련의 결론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광풍 대신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 41 절 말씀입니다 . “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 이 말씀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심한 두려움을 가졌다고 합니다 . 어떻게 보면 제자들이 평안 대신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역설적으로 “ 참된 평안 ” 의 시작이 바로 “ 참된 두려움 ” 입니다 . 우리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할 때 , 그것과의 평화를 도모하는 노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 “ 가난 ” 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평안함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 . “ 질병 ” 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운동과 건강 관리를 통해서 , “ 외로움 ” 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많은 친구들을 통해서 평안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 이런 의미에서 , 하나님과의 평안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 마태복음 10:28 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그렇습니다 . 세상에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 오늘 본문에 나오는 “ 광풍 ” 도 그것들 중 하나입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 ”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심어서 협박을 하시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 이것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참된 평안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 제가 설교에서 자주 인용하는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라는 분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 “ 사람이 용기를 갖게 되는 방식이 있습니다 ; 큰 위험을 두려워할 때 , 그 사람은 그보다 작은 위험들을 직면할 용기를 갖게 됩니다 ; 그리고 어떤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할 때 , 그는 마치 다른 위험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 (This is the way a person always gains courage; when he fears a greater danger, he always has the courage to face a lesser one; when he is exceedingly afraid of one danger, it is as if the others did not exist at all.)”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 있을 때 , 다른 위험들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 이것이 “ 참된 평안 ” 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광풍 속에서 그 평안을 누리셨습니다 .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바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갖게 되는 참된 평안 , 그리고 참된 용기입니다 . 사도행전 4:19 절에서 ,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또 갈라디아서 1:10 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으로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 따라서 하나님과의 화평이 그들에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에는 “ 보이는 게 없는 ” 사람들이었습니다 .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 참된 평안 ” 입니다 .
평안은 “ 관계 ” 입니다 .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평안에 관해서 창세기 2:25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느니라 .” 둘 사이에 두려움이나 수치심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고린도전서 13:12 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는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때가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것이며 ,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려움이나 수치심 같은 막힘이 전혀 없게 되는 것입니다 . 이것이 “ 완전한 관계 ” 이며 “ 완전한 평안 ” 입니다 .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닙니다 . 지금은 우리가 “ 거울로 보는 것 같이 ” 희미하다고 합니다 ( 오늘날의 그것과는 달리 옛날 거울은 희미해서 형체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은 “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 질문합니다 . 이렇게 제자들은 두려운 중에 주님을 배우며 ,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 이런 의미에서 광풍은 제자들을 거짓 평안에서 참된 평안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입니다 . 우리가 보기에 “ 이편 ” 에 비해 “ 저편 ” 은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고난의 땅으로 보입니다 .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으시고 우리가 다만 희미하게 알고 있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 저편 ” 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 하지만 일단 “ 믿음의 배 ” 를 타게 되면 우리는 진실을 알게 됩니다 . 우리가 이제까지 살얼음판을 걷듯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삶을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 우리의 삶은 믿음의 배를 타고 참된 안식의 소망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항해입니다 . 그리고 매우 감사하게도 이 배에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십니다 .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안에 주님께서 늘 깨어계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참된 평안 , 참된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우리가 이 땅에 매이지 않고 “ 담대한 항해 ” 를 계속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