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말씀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8:1-2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4. 18. 03:52
말씀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8:1-20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Easter Sunday)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함께 기독교 복음을 구성하는 두 기둥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복음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15:3-4). 화룡점정(畫龍點睛)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그 눈동자를그린다”는 것인데, 이 말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낸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옛날 중국 양나라에 양승요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그가 용을 두 마리 그렸으나 그것들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용의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믿지 않자 그는 그 두 마리 중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용이 살아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다른 한 마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복음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받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복음이 된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복음은 우리가 받고 신앙하는 “복음(Good News)”이 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받쳐주는 기초(foundation)가 됩니다. 이 부활이야말로 우리를 이생에서 영생으로 이어주는 가교(bridge)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강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은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믿기 어려운 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도인으로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사람들의 불신앙에 부딪히면서 자주 이런 어려움을 느낍니다. “성경책에는 왜 이렇게 믿기 어려운 말씀들이 많을까?” 하는 불평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본보기가 되는 “훌륭한 삶”을 사시고 많은 좋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결국,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부활”의 문제에서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의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이 때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 내용의 새로움을 인하여 격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17:18b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바울이 오직 부활에 대해서만 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심하게 울린 것은 결국 이 부활의 소식이었습니다. “으잉! 죽은 자의 몸이 다시 살아났다고?” 또 같은 장 17:32절 말씀에 따르면,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고 합니다. 곧 사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이를 비웃고 배척하며, 어떤 사람은 이에 오히려 마음이 열리고 복음의 말씀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갈리는 것은 결국 “몸의 부활을 믿는가?” 여부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그 불신앙을 극복하기 전까지는 결코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 사람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칭송하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성경책을 읽으시다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부분을 읽으시고는 성경책을 덮으셨다고 합니다. 너무 믿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철학과 종교를 섭렵하시면서 오랜 세월을 보내신 후 다시 성경책을 펴셨다고 합니다. 후에 아버지가 깨달으신 것에 대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성경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복음을 거절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의 신앙과 불신앙을 가르는 “분수령(watershed)”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 산을 넘은 자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신앙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게 되며, 이 산을 넘지 못한 사람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신 지 사흘 째가 되는 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복음서에는 여러 명의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나옵니다.그들 중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마가복음 16:9절에서는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 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고, 또 누가복음 8:2절에서는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고 하는 마리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다른 마리아”는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마태복음 27:56),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마가복음 15:47),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마가복음 16:1) 등으로 기록된 마리아와 동일한 인물로 보고 있는데, 이 마리아는 요한복음 24:10절에 나오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같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이유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가복음 16:1-3). 이들은 또 예수님의 무덤 문이 큰 돌로 막혀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누가 그들을 위해 이 돌을 굴려줄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두운 새벽에 아무도 없는 적막한 길을 더듬으며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이 여자들의 마음 또한 무덤 문을 막은 돌만큼이나 무겁고, 슬프고, 힘겨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다시 빌라도 앞에 모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훔쳐내서 감춘 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님의 무덤을 막은 큰 돌을 인봉하고 그 앞에 파수군을 세웠습니다 (마태복음 27:62-65). 이들은 예수님을 무덤 속, 사망 권세 아래 가두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소망을 끊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실상무덤 속에 갇혀 사망 권세 아래 두려워 떨고 있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한 여자들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돌 입구를 지키는 험상궂은 로마 군병 대신 눈 같이 흰 옷을 입고 그 형상이 번개와 같은, 하늘에서 내려온 주의 천사였습니다. 이 주의 천사가 큰 지진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이 천사 앞에서, 오히려 파수군들이 무서워 떨면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격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예수님께서 그 묻히신 무덤 속에서 일어나셔서 밖으로 나오신 한 작은 사건이 아닙니다. 이 일은 오늘 말씀에서처럼 참으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이는 경천지동(驚天地動)의 대사건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람들 가운데 죽음의 역사가 끝나고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거대한 전환점(turning point)입니다. 무덤 문이 열리고 우리 앞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격변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자들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혁명”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기 전, 저의 인생 문제는 “공허함(emptiness)”이었습니다. 허무함, 무의미함 등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평범하고 모범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 내면의 어두움은 칠흑과 같았습니다. 마치 무덤 속에 갇힌 듯 했습니다. 저한테는 “진심으로 내가 기뻐하고 좋아할 만한 것,” “진심으로 내 마음을 쏟아부을 만큼 의미 있는 것,” “진심으로 내 삶을 가치 있고 고상하게 만들어 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고, 기운도 없고, 보람도 없었습니다. 제 유일한 친구는 “담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어두운 하늘조차 별처럼 밝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며 무슨 다정한 말씀을 건네시는 듯, 보드라운 바람으로 내 몸을 감싸며 어루만지시는 듯 했습니다. 한동안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큰 병이 있어서 치료를 받았거나, 큰 문제가 있어서 해결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으로 이 경천지동(驚天地動)의 사건이 제 개인의 인생에 일어난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되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큰 지진이 나면서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내려와 예수님께서 누워계신 무덤의 돌 문을 굴려내고 예수님께서 걸어나오시는 것에 버금가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 부활의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크고 놀라운 선물입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이 말씀은 천사가 세상에 전하는 맨 첫 번째 “부활의 소식”입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을 (마태복음 27:56), 그리고 예수님의 몸이 바위속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마태복음 27:61) 두 눈으로 지켜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과 묻히심과 동시에 그들의 영혼 또한 함께 죽고 묻힐 만큼 그들은 깊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그녀들에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누가복음에서는 오히려 조금 책망을 하듯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여러 날 전부터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시고 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9, 마가복음 9:31; 10:34, 누가복음 18:33 등). 심지어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조차 기억할 정도였습니다 (마태복음 27:63). 그리고 과연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성경에는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 믿는 자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형식으로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늙어서 몸이 죽은 자와 같이 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 이삭을 주신 일입니다. 창세기 21:1-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 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이 짧은 말씀 속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또는 “하나님의 명대로”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본문에 따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이 아들을 이삭이라고 이름 지은 것도 하나님께서 미리 그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창세기17:19). 이 “말씀대로”라는 말은 “늙은 아브라함”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아브라함의 몸이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이루어지는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불가능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믿음에 대해서 로마서 4:17-2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조금 길지만 제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아브라함)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고 하시고, 그에게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후손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5). 하지만 이 하나님의 약속에는 “중요한 허점”이 있었습니다. 곧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대를 이을 아들이 하나도 없었으며, 또 그와 그의 아내 사라의 몸은 더 이상 자녀를 잉태할 수 없이 늙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이 “죽음의 벽”을 넘어서는 어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주님! 저는 늙었으니 이제 포기하시고, 다른 젊은 사람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시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이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이 믿음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너머에 있는 것들입니다. 죄사함과 성령 세례와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이 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지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약속의 말씀들을 다 이루실 것을 또한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이 늙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 무덤에 묻히신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죽음”과 방불한 연약함들이 있습니다. 이런 내게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나의 상태나 나의 가능성을 따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믿음이 만나야 하는 곳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믿음”으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이를 우리의 “의”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따라,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은혜의 복들을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자들은 돌아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평안의 인사를 건네시고 또 제자들에게 전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반면에 같은 일을 목격한 파수군들은 성내로 들어가서 이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한 후, 많은 돈을 받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거짓 증인”이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부활과 생명의 소식보다 사단 마귀의 속이는 죽음의 소식을 훨씬 잘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거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죽음이 거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말씀대로 다시 살리심으로 이를 우리에게 보이시고, 또 우리가 이 생명의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이로써 우리 안에도 죽음이 거할 곳이 없는 참으로 밝고 생명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음의 벽을 넘어 밝은 하나님 나라 영생의 소망을 향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참된 신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