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5:1-1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5. 30. 08:22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5:1-17

 

기독교 신앙을 간단히 정의하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종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내용과 열매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 (무엇이) 되시는가, 예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마태복음 16: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것은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그들에게 생명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실 이보다 근원적인 질문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관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무엇)인가? 삶의 이유와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그리고 존재하는가?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참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혹자는 나는 이런 고민들을 하지 않아! 그냥 사는 거야!” 라고 말할 있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또한 나름대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들이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중요한 질문들을 뒤로 , 먼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질문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이는 우리가 스스로 존재하는 (being)” 아니라 무엇인가를 의존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거하는 (abider)”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의 가치와 열매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 “내가 나의 생명을 위해 의지하고 따르고 거하는 그것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 설교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말씀의 요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의 관계를 가리켜, 각각을 농부와 포도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하십니다. 농부와 포도나무와 가지는 서로 구별이 되는 존재들이지만, 가지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으며 공동의 목표로 묶여있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여 함께 일을 합니다. 공동의 목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과실입니다. 과실을 많이 맺는 것입니다. “과실또는 열매 성경의 중요한 주제들 하나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식물들과 동물들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식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땅은 풀과 맺는 채소와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하십니다. 식물들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안에 갖고 있으며 열매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식물들은 성장하고 번식하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태계에 식량을 공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과 사람에 대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하십니다. 비록 열매라는 말을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열매는 하나님의 축복의 소산이며 자체가 또한 새로운 축복이 시작이 됩니다. 모든 생명의 개체들은 기본적으로 열매 통해 성장하고 번식하는 능력을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2-3장에는 중요한 가지 나무가 나옵니다. 하나는 생명 나무이며,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뱀의 거짓된 유혹에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실과를 먹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죽을 때까지 먹을 것을 위해 땅을 갈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죄의 뿌리고 죄의 열매 맺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의의 받아 의의 열매,” “생명의 열매 맺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열매 농부가 마지막 추수 때에 거두는 결과물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밭에서 수고를 하는 이유는 가을에 열매를 수확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는 농부가 흘려 일하는 유일한 이유라고 있습니다. 가을에 열매를 거둘 없다면, 그는 헛수고를 것이며 그의 많은 고생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참으로 농부의 소망은 오로지 마지막 열매 있습니다. 그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모든 수고와 희생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농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당연한 상식입니다. 하지만 열매를 우리의 삶과 연결시켜서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대하는 인생의 마지막 때에 거두게 열매로 죽음이외에 별다른 좋은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늙어서 병이 들고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이 우리가 아는 모든 생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에게 때는 열매를 거두는 때가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가 인생에서 거둔 열매들까지도 내려놓아야 하는 때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때를 두려워하며 가능한 그것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기를 원합니다.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때를 영원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년을 지연시킬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결국 날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우 두려운 사실은 우리의 열매를 기대하며 추수 때를 기다리는 이가 있으며, 농부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포도원의 농부가 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주인이시며, 당연히 포도나무의 주인이시며, 열매의 주인이시라는 말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인 농부가 포도나무를 귀하게 여길까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농부가 포도나무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열매 때문입니다. 2 말씀입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농부는 포도나무를 가꾸되 열매를 많이 맺는 방식으로 그것을 가꿉니다. 그래서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 버리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많이 맺도록 가지를 깨끗하게 합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가꾸는 방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가꾸는 방식과는 매우 다른 같습니다. 우리는 제해 버린다 자체에 거부감을 가질 있습니다. 열매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열매로 우리의 삶을 판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인생은 나의 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내가 인생에서 무슨 열매를 맺든 그것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며,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시며,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고, 인도되고, 살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진리 안에서 우리가 가졌던 여러 중요한 질문들 나는 누구(무엇)인가? 삶의 이유와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참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등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과실을 맺는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가장 일은 바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포도나무라고 하시고,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라고 하십니다. 가지에게 있어서 포도나무는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지의 형질이 오직 포도나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24절에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말씀은, 비록 포도나무대신 감람나무 비유로 사용한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의 가지가 되었는지, 그리고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우리가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았다 합니다. “ 돌감람나무 로마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거하며 살아왔던 세계를 말합니다. 속에는 우상숭배와 정욕과 거짓 그리고 온갖 종류의 불경건과 불의가 뒤섞인 검은 액체가 흐릅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은 해로운 돌감람나무에 거하며 매일 숨을 쉬듯이, 물을 마시듯이, 밥을 먹듯이 수액을 흡입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았습니다. 그것과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상 그것과는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에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본성을 거스른다 말이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돌감람나무로부터 찍힘을 받았지만, 여전히 돌감람나무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감람나무 접붙임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로마서 11: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되었은 ……” 우리가 매일 참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흡입함으로써, 우리 속에 있던 돌감람나무의 본성들이 점차로 씻겨나가고 우리 또한 참감람나무의 깨끗하고 열매 맺는 형질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으며, “본성을 거스르는 노력 요구됩니다. 그것은 마치 외과수술을 당하는 듯한 고통을 수반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이 싫어서 우리는 우리가 본래 갖고 있던 돌감람나무의 본성을 고집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진액을 흡입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나의 욕심을 따라 움직여주시기를 요구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열매 없는 돌감람나무로 남게 되며 결국은 좋은 감람나무로부터도 찍힘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안에 죄와 정욕의 오염물질이라고는 0.0001ppm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샘물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샘물이 없습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교훈들은 듣기에는 훌륭해도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먹물로 얼룩진 때를 먹물로 지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말씀만이 우리 영혼을 죄와 정욕으로부터 깨끗하게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묵상하고, 아멘 하며 영접하고 순종할 물이 우리의 악한 본성들을 드러내고 씻어냅니다.

 

4,5 말씀입니다. “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없음 같이 너희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안에, 내가 안에 있으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없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안에 거하라하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만큼 거한다 말씀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와 그것의 가지를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람이 존재하는 최상의 방식입니다. 포도나무에 거하는 가지로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살아있으며, 깨끗함(거룩함) 유지하며, 나아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나무의 가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뭔가 불안하고 불완전한 구석이 있습니다. 자신이 독립된 하나의 나무 살아간다면 좀더 자유롭고, 안정되고, 완전한 성취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독립된 하나의 나무가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거하는 또는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기를 호흡하고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과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나무에 거하는가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라고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무 조건에도 매이지 않고,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있는 ”(being)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거하는 (abider)”입니다. 물론 우리는 보다 풍요롭고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내가 무엇에 거하는지를 선택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경제적인 풍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나오는데 그는 예수님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성령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보고는 돈을 주며 성령 세례의 권능을 사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주고 줄로 생각하였으니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 말하며 그를 심하게 책망합니다. 마술사 시몬은 돈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돈과 함께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썩어질 것에 거하며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결국 맞이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운명입니다.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 기초가 무너지고 이와 함께 집도 부숴지는 것입니다.

 

가지 불완전합니다. 가지는 불완전해서 모든 것을 그것이 거하고 있는 나무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가지가 견실하고 충실하게 포도나무에 거하면 그것은 포도나무가 누리는 생명과 강함과 풍요로움을 똑같이 누릴 있습니다. 포도나무만큼이나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의 완전함이다(To need God is perfection)”라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nothing) 인식할 비로소 그가 도달할 있는 가장 높고 위대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예로 모세를 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셨을 , 모세는 여러 부정적인 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3:11)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4:10)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4:13)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의 부족함에 대해서 일일이 대답해 주십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3:12)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 이제 가라 내가 입과 함께 있어서 말을 가르치리라.” (4:11-12) 과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시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로 앞에 하나님과 같게높이셨습니다 (4:16, 7:1).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내가 누구관대……” 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하소연할 , 그에게 아냐! 너는 있어!” 이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자신의 종으로 부르셨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는지를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불완전함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nothingness) 깨닫기 위해, 그리고 예수님의 포도나무 되심을 영접하기까지 추가적으로 깨어지고 겸손해지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 각자가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거하는 (abider)” 되었으며 많은 열매를 맺게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과실을 많이 맺는다 말은 자주 나오지만, 과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써 맺게 되는 과실을 마디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 안에 거한다 말은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왔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연명하던 거지가 어느 갑자기 왕자가 되어 왕궁에 살게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제자가 되리라” (8) 하시고,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14)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굳이 “OO 위해 돈을 번다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돈을 번다 함으로 그는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체가 내재적인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OO 위해서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좋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로 우리 인생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여러가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는 무엇보다도 의의 열매이며 생명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열매이며, 영원한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되심을 인하여, 그리고 우리가 안에 거하는 가지가 됨을 인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