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6:45-5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6. 6. 00:55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6:45-52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신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먹이신 후에, 먼저 제자들을 배를 태워 건너편 벳새다라는 마을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홀로 남아 무리들을 흩어 보내시고, 예수님 자신은 기도하시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가 바다 한 가운데를 지날 때, 바람이 거슬러 붊으로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거센 풍랑과 싸우면서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저었습니다. 47절에 “저물매” 곧 저녁때가 되어 “배가 바다 한 가운데 있었다”고 하며, 48절에는 “밤 사경” 곧 새벽 3-4시 쯤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제자들은 최소한 7-8시간을 이렇게 풍랑이 이는 바다 한 가운데 어둠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형편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6장의 시작 부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둘씩 짝을 지어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치며 회개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잠깐 쉬기 위해서 배를 타고 조용한 곳을 찾아 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먼저 와서 예수님을 기다림으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저녁 먹을 때가 되자 제자들은 사람들을 흩어 보내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권능으로 5000명의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음식이 풍족하기는 했지만, 제자들은 이 많은 무리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또 식사가 끝난 후 남은 조각을 거두는 웨이터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쉴 틈도 없이 다시 배를 저어 풍랑이 이는 밤바다를 건너게 된 것입니다. 오랜 시간 바람과 싸우며 괴롭게 노를 젖고 있는 제자들의 몸과 마음은 물에 젖은 솜처럼 지치고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셔서 옆으로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여 놀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인도하심을 보면 아주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극한 훈련”을 받는 해병대 훈련병과 같은 느낌입니다. 이런 극한 훈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로부터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는 것일까요? 50절을 보면 심하게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시며 그들을 안심시키셨습니다. 또 51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곧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극한의 상황”이 끝나고 금새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때는 먼동이 트기 전이고 아직도 그들은 바다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새벽을 알리는 빛살이 환하게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이제 발을 땅에 디딘 듯 평안하고 즐거웠습니다. 물에 젖은 솜처럼 지치고 무거웠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노를 젓는 팔에는 힘이 넘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생명과 빛”이 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예수님으로부터만 그들의 생명과 빛을 공급받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발광체”라는 것이 있고, “반사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발광체(luminant)란 “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하늘의 해가 그렇습니다. 반대로, 반사체(reflector)는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하고 다만 발광체로부터 오는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밤하늘을 밝히는 달이 그렇습니다. 반사체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발광체가 없으면 당연히 그 빛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아주 환한 발광체가 가까이 있다면, 반사체라도 밝은 빛을 낼 수가 있습니다. 밤을 환하게 밝히는 보름달처럼 말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발광체 같은 이들이 있고, 또 반사체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발광체 같은 사람은 그냥 그 존재 자체로 빛이 나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줍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내면에 늘 짙은 어두움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밝히기 위해서 어떤 외부의 빛을 의존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신의 많은 돈은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돈”이 그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발광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빛을 받아서 그 사람은 “성공한 부자”로 광을 내면서 살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가진 돈을 다 잃게 된다면, 혹은 불치병과 같이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행을 만나게 된다면, 혹은 돈을 "빛"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앞에 선다면, 그는 자신을 비추어주는 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연인”으로서의 자신만 남게 됩니다. 만일 그의 속에 오직 어두움과 두려움만 가득하다면 그는 전혀 빛을 낼 수 없는 암체(暗體: dark body)가 되어 매우 어려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50:11절 말씀입니다.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밝혀줄 횃불들을 여러 개 켜 놓고 그것들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쌉니다. 그리고 그 빛들을 자랑하며, 생명처럼 붙들고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이 횃불들은 우리가 인생에서 “성공”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경제적인 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안정된 직장, 높은 지위, 벽을 장식하는 졸업장들과 표창장들, 여러 종류의 일등과 우승과 금메달, 착한 일들,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경험들 ….. 이런 것들은 “나”라는 존재가 사람들 가운데서 빛이 나도록 내가 의지하는 바 일종의 “발광체들”입니다. 또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밝히기 위해서 서로를 의지합니다. 요한복음 12:43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책망하십니다. 또 요한복음 5:44절에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며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십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 서로를 칭찬하고 높이고 영광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에게 빛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 이렇게 자신이 피운 횃불로 자신을 둘러싸고, 그 영광에 취하여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우리가 세상에서 밝히는 불들은 참 빛도 아니며,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결국 꺼지며 그것들을 의지하여 살아온 사람은 슬픔 중에 눕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로 제자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보내실 때 그들이 여행을 위해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8-9).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노숙자(Homeless)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쫓고, 병인들을 고치고, 복음을 가르치는 엄청난 일들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 일들을 아주 훌륭히 해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5000명의 배고픈 무리들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사실 정작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먹을 것이 없는 노숙자(Homeless)와 같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오히려 그 많은 무리들을 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배를 태워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항해 도중 거스르는 바람을 만나 깊은 밤 바다 한 가운데 오도가도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앞이 캄캄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캄캄한 현실이 여전히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예수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시며, 예수님께서 그들의 안전한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제자들이 잠깐이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기들끼리 어두운 바다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적은 한 시도 없습니다. 47-48절을 보면,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 있고 예수님께서는 아직 뭍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서 괴롭게 노를 젓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예수님의 시야 안에 있었으며, 제자들은 항상 예수님의 접근 범위 안에 있었습니다. 물리적인 거리, 시야를 가로막는 어두움, 건널 수 없는 바닷물, 위협적인 바람과 파도가 예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함께 하심과 보호하심은 이런 모든 한계들과 장애물들을 마치 없는 것처럼 무시하는, 참으로 “전능한” 그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9: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또 로마서 8:3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또 이어서 8:38-39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말씀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도 바울이 열거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는 우리 곧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많은 위험들 속에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며 또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제자들의 삶이 마치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는 도살할 양”과 같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36). 그냥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위험들은 “피조물”에 불과하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늘 그와 함께 있으며 늘 그에게 이김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무한의 발광체”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라도 그 빛을 잃고 (요엘 3:15), 바람에 떨어지는 과실처럼 떨어질 때가 옵니다 (요한계시록 6:13).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그 빛과 능력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늘 그 자녀들을 향하여 환하고 따뜻하고 신실하게 빛나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습니다. 늘 깨어 계시며, 늘 들으시며, 늘 돌보시며, 늘 손을 뻗어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전혀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가!” 하며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심으로 제자들을 안심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곧 바람이 그쳤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마음에 심히 놀랐습니다. “놀람의 연속”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사람 같은 이가 어둠 속에서 물위를 걸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센 바닷바람을 선풍기 끄듯 꺼버리는 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기한 능력을 보고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52절은 말씀하기를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합니다. 제자들은 얼마 전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실 수도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도,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실 수도,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실 수도,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며, 또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은 ……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께 관한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하지만, 이렇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예수님”보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운 마음은 우리 속에서 “무서운 상상들”을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 안에서 옛 습관들을 버리고 점차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까지도 잘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상상력 (imagination)”입니다. 곧 어떤 일이 생기면 그것을 시작으로 나쁜 상상들을 펼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너 나랑 얘기좀 하자!” 이러면, “내가 뭐 잘못했나?” 하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시간이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혹시 무슨 사고가 났나 걱정이 됩니다. 몸이 불편하면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작은 실수가 오해를 일으키고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지나가는 말 한 마디를 마음에 담고 곱씹으면서 나쁜 상상의 날개를 펼칩니다. 이런 사람들의 연약함을 생각하면, 밤에 바다 위를 걸어 유령같이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잘못을 하신 것입니다. 이를 보고 놀라 가장 나쁜 상상을 하면서 “유령이닷!” 비명을 지른 제자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합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반응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 것에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딸이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8:50). 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9:23). 이 말씀들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오직 “믿음의 상상,” “빛의 상상,” “영광의 상상”만을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변화되고 성장하는 그 끝에는 “좋은 상상”이 있습니다. 이제 어두움과 두려움 속에서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빛 안에서 항상 좋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켜 놓으신 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이 빛은 모든 어두움을 다 이기며 항상 우리 안을 모든 좋은 것들로 가득 채우십니다.
고린도전서 1:28-31절 말씀으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체로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자랑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자랑하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며 슬픔 가운데 눕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은 훈련이며, 또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믿는 자들로서 매일 받는 훈련입니다. 우리가 모든 육체의 자랑들 곧 “육체의 횃불”을 완전히 꺼버리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빛으로 드러내시는 예수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시는 예수님, 내 안에 거주하시며 모든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 내 인생의 항해에 꺼지지 않는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온갖 좋은 생각들과 상상력으로 충만해지며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