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요한복음 19:1-4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6. 27. 00:58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요한복음 19:1-42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성경의 다른 기록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심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과정은 놀랍도록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고해상도의 필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정죄를 당하시고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 사용되는 십자가 형벌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기독교 복음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은 사건이 사람들의 죄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눈처럼 순결하신 예수님께서 주홍 같은 세상의 죄를 하얀 백지장에 그의 피로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을 자세히 공부함으로써 우리의 감추어진 죄의 실상을 들여다볼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실상 보지 못하고는, 그런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도 도저히 헤아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과정에 연루된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들이며, 둘째는 빌라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병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에게 심문을 받으십니다 (요한복음 18:12-13; 19-24). 그리고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져 그에게 심문을 받으십니다 (18:33-38; 19:8-13).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군병들에게 넘겨주고, 군병들은 예수님을 다른 명의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본문에 묘사된 군병들의 행태는 폭력적이고 잔혹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조롱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의 옷을 취하며, 속옷을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들에게 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이들은 고통 당하는 사람을 웃으면서 조롱할 있었고,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가벼운 게임을 있었습니다. 한편, 빌라도는 유대 땅을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책무들 하나는 정의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음을 알고도 즉시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시기로거짓된 고소를 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18). 예수님은 피해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서 정의를 포기하고, 거짓 고소하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대신 오히려 피해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군병들과 빌라도의 죄는 참으로 노골적이고, 선명하고, 진합니다. 이들은 벌거벗은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크니라” (19:11).

 

죄의 먹이사슬의 최상층에는 대제사장들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가장 의롭고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있습니다. 요한복음 18:28절에 따르면, 대제사장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기 위해 빌라도가 머물고 있는 관정 총독의 공관을 찾아갑니다. 이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합니다. 이들은 유월절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인 빌라도의 공관 안에 발을 들여놓기를 거부했습니다. 19:31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과 죄수들을 안식일 전에 치워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손으로 죽이지 않고 빌라도의 손에 넘긴 것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있습니다.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를 싫어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원했지만, 그를 직접 죽이는 죄를 짓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두려움 많은 빌라도와 그의 폭력적인 군병들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의 책략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손에 방울 묻히지 않고 결국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제거할 있었습니다. 그들의 순결함 유지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크니라.”

 

빌라도와 군병들의 죄가 노골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난 죄라면, 대제사장들의 죄는 감추어진 마음의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과 살인심입니다. “거짓과 살인심이야말로 죄의 정신입니다. 빌라도와 군병들이 죄의 행위를 저질렀다면, 대제사장들의 거짓과 살인심은 죄가 일어나도록 연료를 제공한 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죄는 더욱 큽니다. 18:29절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고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사람을 고소하느냐?” 이에 이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고소할 죄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없이 무작정 예수님에게 행악자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유죄 받아들이지 않자, 이들은 예수님을 자칭 유대인의 이라고 고소하면서, 자신들에게는 로마 황제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주장했습니다 (19:15). 예수님을 놓아주는 것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반역을 하는 것이라면서 빌라도를 협박했습니다. 물론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들은 전혀 로마 황제 가이사를 존경하지도 않았으며, 그에게 충성을 바칠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은 거짓말 아주 능수능란했습니다. 자신들의 악한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들의 살인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재판을 빌라도에게 떠넘기면서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 사형은 언도한 것입니다. 이는 이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결심이 굳게 섰음을 보여줍니다. 살인심은 더욱 악해져서 아예 소리를 질러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며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과연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자들이었습니다 (로마서 3:13-15).

 

참으로 두려운 사실은 이들이 가장 흉악한 죄인들이면서 동시에 가장 거룩한 제사장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사단 마귀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이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13-15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거짓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행위대로 되리라.” 어떤 면에서 사단은 스스로는 죄를 짓지 않는 입니다. 깨끗합니다. 대신 사단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참소(accuse)하는 자입니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도록 했으며, 다윗왕을 격동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인구조사를 하게 했습니다 (역대상 21:1).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 욥을 참소하고, 하나님 우편에 서서 하나님의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인하여 그를 대적했습니다 (스가랴 3:1). 사단의 역사는 너무나 교묘하고 거짓되어서 우리가 분별하고 대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의로운 권세 우리 가운데서 행하며, 양심이 약한 자들, 두려워하는 자들, 무지한 자들을 이용하여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참으로 이런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44). 죄는 너무 깊고 커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결국 십자가 죽음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과정은 참으로 사람들의 죄악을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죄악의 희생자가 되신 예수님은 그만큼 슬프고 비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죄악이 선명한만큼 예수님의 깃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깃발은 사랑과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밝히 드러남과 동시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주님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며 그의 손을 빌어 주님을 죽이려 , 복음서 기자는 말하기를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합니다 (18:32).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제비 뽑음으로 성경에 기록된 저희가 옷을 나누고 옷을 제비 뽑나이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19:24).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하시고 포도주를 받아 마시심으로 성경 말씀이 응했습니다 (19:28-29).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내릴 , 관례대로 다리를 꺾지 않고 대신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이를 통해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하신 성경 말씀과 저희가 찌른 자를 보리라하신 다른 성경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19:31-37).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걸음걸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루시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이 돌아가시지 마지막으로 이루었다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소리를 듣느니라” (요한복음 18:37).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목적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 무엇일까요?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 하나님께서 이루실 계획들 등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영원하며, 우리 영원한 생명의 기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 되심은 주님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드리시고, 주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온전히 그대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2:7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짜 하나님의 아들,” “가짜 유대인의 으로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싫어하고 저주하는 죄인으로 멸시하며 성문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진짜 밝혀졌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로운 돌이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4).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심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리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에 밝히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진리 자신의 목숨보다 훨씬 중요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진리 바로 예수님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진리에 순종하고 진리를 증거하심으로, 그것이 또한 우리의 생명이 됨을 우리에게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증거를 받도록 그의 피로써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 사랑의 깃발 높이 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받고 계실 , 곁에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이 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친 마리아와 제자 요한이 곁에 있는 것을 보시고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시고, 요한에게는 보라 어머니라하셨습니다. 요한은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의 일도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사실을 감추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는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나아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가기를 구하고 그의 허락을 얻어 시신을 받아 유대인의 장례 법을 따라 장사 지냈습니다. 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았던 바리새인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시신에 사용할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근쯤 갖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은 참으로 고통이며, 두려움이며, 어두움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극한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오히려 두려움에서 깨어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며, 그들에게 부탁하신 사랑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사랑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고, 사랑이 두려움을 압도하고 집어삼키는 순간입니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의 깃발 홀로 남아 펄럭이는 것입니다. 요한1 4:18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 눈으로 보기에 모든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 움직이며 어떤 사람은 두려움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 두려움에 쫓겨 움직이는 사람은 라고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온전하고 담대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특히 고난 중에 빛을 발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마리아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 만큼이나 컸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예수님은 감싸고 위로하시며 돌보십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크고 위대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심지어 어머니까지 안에 품고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고통 있지만 두려움과 슬픔 없는 것입니다. 사이에는 대신 사랑 있습니다.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며, 영원한 사랑이며, 그래서 기쁨이 되고 힘이 되고 빛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사랑 안에서 주님과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치 안방에 둘러앉은 가족처럼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며 필요한 일들을 행합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오직 이들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영혼 속에 예수님의 사랑의 깃발 높이 들려 펄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참으로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평생 욕심 따라 살면서 이를 채우기 위해서 싸우고 다툽니다. 그렇게 욕심을 내면서 싸우고 다투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4:1-2). 죽는 순간 까지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마귀의 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욕심이 없이 오직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시는 일에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하실 만큼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루심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상 욕심 따라 필요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가진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의 진실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명한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9-10).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는 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욕심 생길 , 우리는 이것을 채우기 위해서 다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욕심을 내려놓아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매일 죽노라합니다 (고린도전서 15:31). 말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셨기 때문에 세상에 자신이 붙들고 늘어질 것이 이상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의 온전한 은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매일 이곳으로 돌아가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이루심 기억해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힐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을 거쳐 십자가 안에 숨겨진 보배들 찾아내야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유일한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심을 주시고, 축복하시고, 응답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