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열리라 (마가복음 7:31-3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7. 11. 03:36

열리라

 

마가복음 7:31-37

 

인터페이스 (Interf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의 사전적인 정의는 독립적인 시스템, 주체, 기관 등이 만나서 상호 작용을 하거나 소통하는 장소(the place at which two independent systems, subjects, organizations, etc. meet and act on or communicate with each other)”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 인터페이스는 우리 생활의 모든 곳에서 쉽게 찾아볼 있습니다. 예를 들어전기 콘센트 일종의 인터페이스입니다. 우리가 TV 냉장고 같은 전기 기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구와 연결된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아야 합니다. 그러면 전기 회사의 전기 공급 시스템과 전기 기구가 연결되고, 전기가 흘러서 전기 기구가 작동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전기 콘센트라는 인터페이스가 없다면, 전기 기구는 전기를 없게 되고 따라서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자동차에도 운전 장치이라는 인터페이스가 있습니다. 인터페이스는 사람인 운전자와 차라는 시스템을 연결시켜줍니다. 사람은 핸들, 브레이크, 가스 페달을 이용하여 운전하는 차의 방향과 속도를 제어합니다. 차의 계기판에 표시되는 여러 신호들이 차의 상태를 운전자에게 알려줍니다. 이런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사람인 운전자와 기계인 차가 마치 결합하여 함께 움직일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 일종의 인터페이스입니다. 장소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이 만나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말씀을 들으며, 교회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십니다. 이렇듯 인터페이스 서로 다른 주체들이 만나서 상호 소통하고 작용하는 장소 또는 장치입니다. 우리의 삶은 실상 수만 가지의 인터페이스들을 통해서 세상의 다른 사람들, 기관들, 시스템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매일같이 그것들과 소통하고, 이용하고, 작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인터페이스들 중요한 것에 문제가 생길 경우, 우리는 대단한 어려움을 겪게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 고치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두로라는 이방 도시에서 여자의 간청을 받으시고 그녀의 어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일이 있은 , 예수님께서는 북쪽에 위치한 시돈이라는 도시로 가셨다가 거기서 데가볼리 지방을 통해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갈릴리 호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마가복음 1:16) 사람들에게 뿌리는 자의 비유 가르치셨던 (마가복음 4:1) 가버나움 근처의 갈릴리 호숫가가 아닙니다. 그곳과는 반대쪽 호수의 동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어떤 영어 성경은 데가볼리 지방의 갈릴리 호수 (Sea of Galilee in the region of the Decapoli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ESV).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머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먼저 유대 땅에서 예수님께 대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적대감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주변의 이방인 지역에도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곳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특히 데가볼리 지방은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후에 그를 선교사로 파송하신 곳입니다 (마가복음 5:20).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과 함께 얘기하시며 준비하실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귀먹고 어눌한 사람 그를 데려온 친구들은 아마도 지방에 사는 이방인들로 보입니다. 이들 또한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주님의 안수하심과 치료하심을 바라며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33,34절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치료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따로 데리시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에바다하셨습니다. 이는 아람어로 열리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그의 말이 분명해졌습니다. 제가 앞에서 인터페이스 대해서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료하시는 모습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손가락을 사람의 귀와 혀에 대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 사람의 병든 귀와 혀를 만지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불쌍한 사람의 몸이 예수님이라는 인터페이스 통해서 하늘과 연결되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령한 치료의 능력이 사람의 몸으로 내려오는 길이 열리게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상태에서 탄식하셨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우선은 귀먹고 어눌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불쌍한 사람의 깊은 속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탄식이 예수님의 마음에 메아리를 것이라고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도 없고 말을 분명하게 수도 없습니다. 그는 중요한 소통의 기능들을 잃었습니다. 오늘날은 , 사진, 비디오와 같이 눈으로 있는 시각 매체들도 다양하고, 청각장애자들이 의사 표현을 있는 방법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모든 정보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들을 있는 자는 들으라하시며 입으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은 마치 독방에 갇힌 죄수처럼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었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사랑방에 모여 웃고 떠들며 수다를 떨어도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어여쁜 아가씨와의 즐거운 데이트는 상상조차 없는 세상 이야기였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에게도 말할 없는 그는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있는 유일한 일은 속으로 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같은 마음을 가지시며, 같은 고통을 겪으시며, 같은 안타까움으로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16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대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둘을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인터페이스역할을 수행하는 직책입니다. 위에 인용한 히브리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갖추신 중요한 가지 덕목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는 죄가 없으시다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 것입니다. “체휼한다 말은 다른 사람이 어떤 고난이나 고통을 겪을 , 그로 인해 똑같은 고난이나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는 뜻합니다. 이것은 동정심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마도 아파서 괴로워하는 자녀를 보면서 아이고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네하면서 자녀보다 괴로워하는 부모님의 마음과 비슷할 같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심이 부모가 자식의 연약함을 체휼함보다 훨씬 더하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의 탄식을 들으시고 이해하시며 우리를 향한 긍휼하심이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실 때는, 우리의 고통을 고스란히 마음에 안으시고 우리처럼 탄식하시면서 나아가십니다. 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완벽한 인터페이스 되십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8:26-27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시는지를 설명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이십니다 (로마서 8:9).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이라고 이해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또한 가지 덕목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없는 탄식으로,” 간절함으로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연약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해야 것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바를 알지 못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간절하게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말할 없는 탄식으로 표현될 만큼 간절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심이 탄식이 터져나올 만큼그렇게 각별하기 때문입니다. 간절함은 하늘을 찢어 열고, 우리가 땅에서 겪는 문제들을 하늘 꼭대기까지 끌어올려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간절함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 모세가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할 , 사무엘의 모친인 한나가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할 ,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녀의 귀신들린 어린 딸을 위해 기도할 ,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실 등등 …… 이들의 간절한 마음 마치 속이 파이프와 같습니다. 자신은 완전히 비우고 안을 오직 기도의 소원으로만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 모든 다른 것들을 뒤로 하시고, 오직 귀먹고 어눌한 영혼을 위해 자신을 전부 드리시고 그를 위해 탄식하시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완벽한 인터페이스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향하여 에바다하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서 말을 분명하게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없지만, 아마도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에바다 아람어로 열리라 뜻입니다. 물론 그의 막힌 귀가 열리라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함께 하늘로부터 치료의 능력이 예수님의 손가락을 통해 그의 안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료하시는 사건과 함께 연상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곳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집안을 가득 채우더니 불의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들에게 보이며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각기 다른 나라 방언으로 말을 하자, 세계 곳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사도행전 2:11). 성령께서 제자들 가운데 임하셔서 첫번째로 행하신 일은 말을 통하게 하신 것이며,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사람들 가운데 널리 전파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에바다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자들의 영혼이 열려 안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제자들의 입이 열려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고, 사람들의 귀가 열려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인터페이스 되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세상에 임하시고,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증거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터페이스는 서로 다른 시스템을 연결해주고, 사이에 소통과 상호 작용이 일어날 있도록 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것처럼, 우리는 각종 전기 기구의 플러그를 전기 콘센트에 꽂아서 전기 공급 장치로부터 전기를 받아 에너지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아도 전기가 흐르지 않아서 기구가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을 구경하고 즐길 뿐이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그냥 덩달아 따라다니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해서는 마음이 닫힌 오직 세상 일과 오락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을 통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볼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콘센트에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원으로부터 차단되어 전기가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따로 데리시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손에 침을 뱉으셔서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런 낯설고 이상한 치료 방식을 싫어하고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잠히 예수님의 손길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끼워 맞추었습니다. 예수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자주 세상 친구들을 떠나 주님 앞에 홀로 서며 부끄러움과 불편함과 두려움을 참는 과정 필요로 합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다니게 되었을 ,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 도전이 되었습니다. 우선은 주일예배 때문에 이전에 친구들과 주말에 즐기던 여러가지 오락들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예배 시작 전에 곁에 앉은 사람과 짝을 지어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해본 적도 없고 숫기가 없던 저에게는 모르는 사람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 다니기를 그만 둘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다른 한편, 작은 부끄러움도 참아낼 없다면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며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참는 입니다. 그리고 일은 본보기로 보여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2:2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료하시자 이를 사람들이 심히 놀라며 말했습니다. “그가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예수님은 그의 앞에 나오는 자들,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주로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는가?” 봅니다. 과거의 업적입니다.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그가 잘하였도다.” 예수님께 대한 이들의 칭송은 합당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알고 믿어야 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에 임하며,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은혜로 나아갈 있게 것입니다. 로마서 5:2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안에서 우리에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소망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소망은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온 것보다 훨씬 크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선한 일을 하셨지만, 그렇게 하신 중요한 목적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기 위해 땅에 왔으며, 자신 안에서 우리가 받게 영원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 자신 우리의 영원한 축복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은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벙어리가 말하게 되는 것과는 비교할 없이 값지고 영광스러운 축복입니다. 시편 24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말씀이야말로 열리라하시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일 것입니다. 영광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기를 깊은 탄식으로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영광의 소망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탄식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탄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