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벳새다의 소경을 보게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8:22-2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8. 1. 04:21

벳새다의 소경을 보게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8:22-26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벳새다의 소경을 보게 하십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라는 마을에 가셨을 ,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와 그에게 손을 대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셔서,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하시자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기초로 저는 본다 (see)” 말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앞에 공부한 본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하시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떡이 없음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고 근심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둔한 마음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제자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칠병이어 사건 전후에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의 닫힌 귀를 여시고 (마가복음 7:31-37),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신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눈이 있다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귀가 있다고 해서 들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의 90% 이상을 시각을 통해서 얻는다고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시각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을 것입니다. 그만큼 본다 것은 중요합니다. 저는 정보를 수집하고 배포하는 일을 수행하는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부대는 비유하자면 인체의 감각 기관들 신경 조직 같은 역할을 하는 기관입니다. 당시 제가 정보병으로서 배운 것들 중에 정보의 단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그널(signal) – 데이터 (data) – 정보 (information) – 첩보 (intelligence)입니다. 시그널은 사람이 보거나 듣거나 느낄 있는 물리적 현상입니다. 소리나 빛이나 사물의 움직임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방 지역에 폭발음이 들렸다면 어떤 중요한 시그널 포착된 것입니다. 데이터란 시그널들이 모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들리는 폭발음들을 여러 기록해두면, 폭발음의 빈도, 소리의 크기 등을 분석할 있는 데이터가 모아집니다. 이렇게 모인 데이터를 분석하여 어떤 사실을 알아낼 있는데, 이것이 정보입니다. 예를 들어, 데이터로부터 적군이 땅굴을 파고 있다 정보를 알아낼 있습니다. 첩보는 보다 고차원적인 내용의 정보입니다. 예를 들어, “적군이 땅굴을 파는 목적은 무엇인가?” 같은 것입니다. 물론 정보 기관의 임무는 단순히 땅굴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내는 것뿐이 아니라 그것의 용량, 목적, 용도 등과 같이 보다 고차원적인 첩보를 알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예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를 있습니다. 우리 몸이 아프면 몸은 고열, 통증, 무기력과 같은 시그널을 보냅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는 여러가지를 묻고, 측정하고, 검사함으로써 진단을 위한 데이터를 모읍니다. 그리고 데이터를 기초로 몸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아픈지에 대한 진단을 내립니다. 하지만 의사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이런 병이 생겼는지,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있는지, 병의 치료법과 예방법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진정한 의사의 눈을 갖고 있으며, 의사의 지식을 갖고 있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하십니다. 그들의 감각은 그냥 그들의 앞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는 것에 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억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것을 보면 (8:18), 제자들은 심지어 현상들을 기억하여 데이터를 수집하는 단계로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조각을 바구니나 거두고,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고 일곱 바구니를 거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눈으로 것으로부터 고차원적인 지식을 향하여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마치, 환자가 열이 높아서 의사를 방문했는데, 의사가 겨우 하는 말이 체온이 높은데요!” 하는 것과 같습니다. 체온이 높다는 것은 환자 자신도 아는 사실입니다. 환자가 의사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열이 나는지, 몸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병이 생겼으며 어떻게 하면 병을 치료할 있는지에 관한 지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이 것을 통해서, 육체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깊은 , 중요한 , 영적인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통찰력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예수님과 같은 영적 지도자요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들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시력, 영적 통찰력을 가질 있는지를 배울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키워드는 본다(see)”입니다. 비록 짧은 말씀이지만, 안에 본다 말이 여러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표현과 의미도 다양합니다. 본문은 본다 말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지 서로 다른 동사들(verbs) 사용합니다. 첫째는 기본 동사인 보다 (vlepo - see)”입니다. 더하여, “우러러 보다 (anavlepo - look up),” “주목하여 보다 (diavlepo - see through),” 그리고 밝히 보다 (emvlepo - look upon)”라는 동사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각각의 말들은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올바른 시력을 가질 있는지에 대한 좋은 지침이 됩니다.

 

첫째로, “우러러 보는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시며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고개를 들어 우러러 보았습니다. 우러러 보았다는 것은 그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건강한 영적 시력의 시작은 하나님께 대하여 눈을 뜨는 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또한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본다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어떤 진리의 지식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우리를 진리의 지식 아닌, “거짓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습니다. 예로, 에덴 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도록 금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때마다 그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들을 하나님께로,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뱀의 꾀임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 또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녀가 보는 선악과는 그녀를 하나님께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것을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있다는 거짓 소망으로 이끌어갔습니다. 그녀가 눈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그녀의 눈을 멀게 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입니다. 이는 그녀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로, 다니엘서 4장에 나오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을 있습니다. 어느 그는 바벨론 궁의 지붕 위를 거닐면서 장대한 바벨론 성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그는 그의 아래 펼쳐진 바벨론 성을 보면서 자신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자기 영광에 눈이 멀어서 인간 나라를 뜻대로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들에서 소처럼 풀을 뜯어먹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들짐승으로 살면서 여러 해를 보낸 마침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이 찼습니다. 다니엘서 4:34 말씀입니다. “ 기한이 차매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느부갓네살 왕의 간증은 우리가 어떻게 올바른 영적 시각을 가질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분을 경외하며,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총명입니다. 잠언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우리가 성한 육신의 눈을 가졌더라도,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지 않고 오히려 멸망과 죽음으로 인도한다면, 우리는 소경입니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하는 아주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 세상을 다스리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있게 되며, 생명에 이르는 길을 걸어갈 있습니다.

 

둘째로, “주목하여 보는것입니다. 25절에 예수님께서 소경을 재차 안수하셨을 , 그가 주목하여 보았다 합니다. 단어의 보다 정확한 해석은 밝히 보다 (see clearly)”입니다. 마태복음 7:3-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속에 있는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말씀 먼저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후에야 밝히 보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밝히 보고 오늘 본문의 주목하여 보더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밝히 보기 위해서 먼저 우리 속에 있는 들보 빼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남의 죄를 지적하고 고치기 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들보 무엇일까요? 형제의 눈에 있는 작은 (speck)”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크고 무거운 들보(plank) 우리가 가장 먼저 회개해야 크고도 무거운 죄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사랑 없음입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의사는 다른 무엇보다도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일 의사가 환자를 귀찮게 여기면서 진료를 대충 하거나, 혹은 환자의 건강 대신 많이 버는 쪽으로 치료 방법을 선택한다면, 그는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다루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겠다면서 식칼 휘두릅니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다가 티를 빼내기는커녕 형제의 눈과 마음을 다치게 합니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티가 들어갔다면, 그는 눈에 상처를 내지 않고 오직 티를 찾아서 빼내기 위해 조심하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만일 당장 티를 빼낼 자신이 없다면, 시간을 갖고 인내하면서 기다릴 것입니다. 그는 오직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할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장 좋은 길을 찾아낼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 그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는 영적인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없다면, 그는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메스를 들고 수술실에서 환자를 수술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인용한 말씀에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여!”라고 부르시는 자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 종교적으로경건하고 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속은 불의한 욕심과 무자비한 살인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내면의 들보같은 죄를 경건한 종교 생활로 덮어 감춘 ,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허물들을 드러내고 정죄하며, 자신의 거짓된 의를 자랑하며 우쭐대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런 자는 눈이 멀어서 앞을 없는 자입니다. “사랑 없음 모든 죄들 중에 가장 죄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온갖 크고 작은 악한 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보 눈에서 빼지 않는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밝은 영적 시력을 가질 없습니다. 속에 형제에 대한 사랑 없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들보를 빼내야 것입니다. 오직 후에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일을 섬길 만한 밝은 눈을 갖게 것입니다.

 

셋째로, “밝히 보는것입니다. 25 뒷부분에, 소경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었을 그가 만물을 밝히 보게되었습니다. 단어는 올바로 본다 (see correctly)”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말의 뜻을 풀어서 설명하면 눈에 보이는 사물 또는 사건의 다양한 측면들을 고찰하여 올바른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다 (to process information and knowledge by giving consideration to the various aspects of what is seen)” 말입니다. 같은 사물 또는 사건을 보고도 환자가 보는 것과 의사가 보는 것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환자는 단순히 열이 난다 사실만을 보지만, 의사는 체온의 높이, 지속되는 시간, 수반되는 다른 증상 여러가지 측면들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속에 감추어진 사실들 환자의 건강에 관한 올바른 지식과 정보 얻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이는 범죄 현장의 종이조각이 명탐정 셜록 홈즈에게는 범인을 찾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이것이 여기서 밝히 본다 말의 의미입니다. 본문의 만물을 밝히 본다 단어가 쓰여진 성경의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26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라!” 하실 때의보라 말이 오늘 본문의 만물을 밝히 본다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를 보라!” 하십니다. 말씀은 단순히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을 구경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공중의 새를 보면서 그것을 통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들을 가만히 보니 이것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먹지 못해서 굶어죽은 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럴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먹이시고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에 비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에 얼마나 귀합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들을 돌보시듯, 아니 그보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자녀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하며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 제자들이 공중의 새를 보면서 생각하고 결론으로 얻어야 하는 올바른 지식입니다. 제자들이 공중의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영적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리고 우리 사람들은 이런 눈을 갖지 못할까요? 가장 이유들은 두려움,” “게으름,” 그리고 무관심입니다. 두려움, 게으름, 무관심은 우리를 영적으로 잠들게 합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으면, 그는 육신의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배가 고플 때만 겨우 눈을 반쯤 뜨고 더듬어 먹을 것을 챙겨 먹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종말을 향해서 바삐 일하시는 데도,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주 깨어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6:41).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8). 믿음에 굳게 서서 의를 행하도록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6:13, 15:34).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4:42-44). 우리가 밝은 눈을 갖기 위해서는 마치 성문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관찰하고, 생각하며, 고민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성경 말씀과 성령의 불을 항상 환하게 켜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좀비처럼 의식 없이 세상의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다가 세상과 함께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움, 게으름, 무관심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멍하니 TV 앞에 앉아서 세월을 허비하기보다는, 영적으로 깨어 능동적으로 살피고, 경계하고, 생각하고, 기도함으로 능히 하나님의 진리를 있는 밝은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밝는 눈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모든 것을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항상 깨어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도록 힘써 우리의 지각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눈이 성하면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태복음 6:22-23). 밝은 눈이야 말로 우리의 빛이요 생명입니다. 우리가 밝은 눈을 가져 몸과 영혼이 밝아지고, 나아가 세상의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는 빛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