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그리스도 나의 자랑, 나의 생명, 나의 행복 (마가복음 8:27-3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8. 15. 01:06
그리스도 나의 자랑, 나의 생명, 나의 행복
마가복음 8:27-38
사람들에게는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어떤 “소망”이 있습니다. 큰 소망이 있고 작은 소망도 있습니다. 또 어떤 소망은 먼 미래의 일이며 어떤 소망은 가까운 장래 일입니다. 이런 소망들 중에는 우리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궁극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인생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 그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 또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이런 저런 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은 돈이나 지위나 쾌락이 결코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그들의 삶의 절대적인 소망이 되는지에 대해서 단언하지 못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그들의 마음 속에 바라는 바를 얘기한다면 그것은 “행복”입니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인지,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또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이점에서 세상을 사는 우리는 마치 아무도 모르는 답을 찾아 함께 방황하는 조난자들과 같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자랑하는 어떤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또한 그 사람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 참 행복의 비밀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통해서 이런 행복을 원합니다. 부모들에게는 그 자녀들이 “자랑”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 귀한 자녀들이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부모님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행복이 꼭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예양(豫讓)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士爲知己者死),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 (女爲悅己者容).” 이 말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믿는 자들이 행복에 이르는 길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자랑”이 되시며, 내가 예수님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을 다니시면서 길에서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간에 떠도는 바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것이 그 당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사람들이 생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훌륭한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일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 편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인정하시며, 다른 한 편으로는 때가 되기까지 이를 비밀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곧 베드로의 대답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로부터 듣기를 기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리스도 (Christ)”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메시아”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4:6, 다니엘 9:25 등). 구약에 하나님께서 왕이나 제사장과 같은 직무를 위해 사람을 세우실 때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 부르심을 공식화하셨습니다. “기름 부음”은 또한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하기에 필요한 능력을 채워 주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0:3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일일이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간단히 몇 가지를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인정하시는 “유일하신”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사도행전 4:11-12절 말씀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가 되면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택하신 자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기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4:23-24). 크리스천이란 오직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믿음을 지키는 자입니다.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를 찾을 필요가 없으며, 찾아서도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실 때는 세례 요한을 통해 세상에 소개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하며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마지막 날 다시 오실 때는 세례 요한과 같은 선구자가 필요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하늘의 천군 천사를 거느리시고 큰 호령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 가운데 임하시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또한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 높으시고 강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무지막지한 권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며,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해집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권세도 두려워하거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든 것 곧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가장 높은 권세”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순복시켜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5-6절 말씀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 걸어야 하는 진리의 길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친히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을 “손수 만드셨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양과 같은 인생들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이 생명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헌신”하십니다. 곧 양들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직책이며, 사명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인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속하는 대속의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영혼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 이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직무를 다 완수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그리스도로서의 직무를 그 목숨을 바쳐 완수하심으로써,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참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구원의 길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전부”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과연 베드로는 예수님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28). 이제 베드로에게는 예수님 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베드로의 소망이며, 자랑이며, 기쁨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인생 전체가 예수님께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매우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31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 예수님께서 곧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에 그런 일은 절대로 예수님한테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붙들며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의 일을 앞세워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책망을 들은 베드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길”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동일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길 곧 “베드로의 길”을 고집했습니다. 베드로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자기의 생각을 하며, 자기의 계산을 하며, 자기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혼을 뒤흔들 만큼 충격적으로 들렸지만, 사실은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곧 “복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 말하고, 이 복음을 가리켜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말씀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1-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그냥 오래 전 예수라는 훌륭한 분에게 일어난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창세 전부터 계획되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며 기쁘게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영원토록 세상에 선포하고 가르치며, 모든 사람들이 받고 따라야 할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를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설계하신 “영원한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이 없으며,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오직 이 길만이 생명을 얻는 길이며,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이 길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며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후,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그냥 예수님 홀로 걸어가신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삶의 원리가 됩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5-37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예수님은 “나와 내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복음”이란 주님께서 앞에서 가르치신 바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38절에 더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여기서도 예수님은 그냥 “나”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와 내 말”이라고 하십니다. 역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무엇을 자랑할까요?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는지 또 그 사람이 무엇을 부끄러워하는지를 잘 살펴보면, 그 사람의 “생명관 (view of life)” 그리고 “행복관 (view of happiness)”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를 가리켜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부르십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히려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 시대를 대표하며 이끌어가는 지성인들(intellectuals)이며 머리들(leaders)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가장 거룩한 신앙인들이며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싫어하여 버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자랑하며 무엇을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높아질 때 한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또 이들은 소유의 넉넉함에 생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누가복음 12:15). 그래서 창고에 많은 것이 쌓여 있을 때 또 한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하시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만 “부끄러움”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대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거짓 형제들”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또 디모데후서 1: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를(복음을)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의 의탁한 것 (what I entrusted to him)”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의 생명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를 “생명의 면류관(crown of life)”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1:12, 요한계시록 2:10).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고난의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 이 생명을 “상”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자랑하시며 면류관을 씌우듯이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내리십니다. 이는 저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과 핍박 중에서 그 이름을 자랑하며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주님의 십자가 복음은 바울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울을 예수님께서 자랑하시고 그에게 영생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것이 참 행복의 비결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과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자랑할 때,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또 사도 바울처럼 미움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고, 죽음의 고통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기를 심히 기뻐하시는 이 예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고, 영원한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행복의 비밀을 깨달아 알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