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9: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8. 22. 04:16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9:1

 

오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권능(power) 또는 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까요? 물론 이것은 단순히 무거운 물건을 있거나 빨리 달릴 있는 육체적 힘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권능은 고차원적이며, 심지어 영적인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 어떤 사람에게 권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제가 군대 있을 , 저의 직속 상관은 계급이 대령이었습니다. 군대 내에서는 높은 계급이며 사병인 저는 그의 옆에 서서 명령을 받을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눠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속한 부서의 부장님은 계급이 소장 별을 개나 장군이었습니다. 가끔 부장님의 비서가 전화를 걸어서 상관을 찾으면서 부장님이 OO 대령을 부르십니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직속 상관의 방에 들어가 부장님께서 찾으신답니다하고 비서의 말을 전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직속 상관은 정말 눈썹이 휘날리도록부장실을 향해 달려갑니다. 육군 대령의 체통도 팽개치고 내달리는 분을 보면서 장군의 권능을 실감하며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장군의 마디 (최소한 군대 내에서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비슷한 광경들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적인 권능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 속에 들어있는 더러운 귀신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잠잠하고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자 귀신이 말에 순종하여 쫓겨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에 나아온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시자 문둥병이 사람에게서 떠나고 그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뜻밖에도 예수님의 이런 권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로마인 백부장입니다. 그는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쓰러져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그를 고쳐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하인을 고치시기 위해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려고 하자 그는 예수님을 만류하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그의 군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서 권능의 의미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하인이 낫겠삽니다.” 이것이 참된 권능의 의미입니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자도 있느니라.” 먼저 예수님의 말씀 중에 죽기 전에라는 말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죽음도 하나의 권세입니다. 군대 상관이 부장님의 말을 무서워하듯이, 귀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듯이, 우리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조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매우두려워합니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권능 행사합니다. 그리고 배후에는 사단 마귀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15 말씀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예수님) 또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시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말씀은 사단 마귀가 어떤 자인지, 그리고 마귀에 매인 사람들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마귀는 사망의 세력 손에 쥐고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 마귀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사망의 세력은 절대적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 말합니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의 일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은 마디로 두려운 죽음을 피하려는 몸부림으로 요약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을 피할 없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원하는 것들을 해보고 싶어합니다. 인터넷 구글에서 죽기 전에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보면 이런 말들이 나옵니다. “죽기 전에 해야 일들,” “죽기 전에 읽어야 책들,” “죽기 전에 봐야 영화들,” “죽기 전에 가봐야 여행지들,” …… 이렇듯 사람들의 삶은 죽음이라는 명확한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기 전에아무리 좋은 것들을 누린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관을 장식한 불과합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서 죽기 전에라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자들도 있느니라하십니다. 여기서 죽기 전에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죽음을 맛보기 (taste) 전에,” 또는 죽음을 경험하기 (experience) 전에라고 번역합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보자면,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 들어가기 전에 잠깐 동안을 살면서 생명을 맛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영원한 생명 들어가기 전에 잠깐 죽음을 맛보고 경험하는 것으로 보십니다. 히브리서 2:9 말씀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요한계시록 1:17b-18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위의 말씀들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땅에 오신 목적들 중에 하나는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또는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잠간 동안 과정이며 경험입니다. 그대로 맛을 보는 입니다. 전에 죽음의 고난을 겪으셨었지만 예수님은 (the Living One)”이십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영원토록 (for ever and ever) 사시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과거에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가졌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열쇠를 쥐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권세가 죽음의 세력을 능가하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아는 죽음이란 우리가 잠간 맛보는 것이며, 이후에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실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마귀의 손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자도 있느니라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말씀을 다른 공관 복음서들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찾아볼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16:2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자들도 있느니라.” 말씀에 비추어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 것은 인자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신다 것과 같은 말입니다. 마지막 때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다시 오시는 일을 가리켜 마태복음 24:3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때가 되면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을 한다 합니다. 왜일까요? 이는 그들이 싫어하고, 멸시하고, 무시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았던 분이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부끄러워하고 버렸던 분이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땅에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여기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처음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권능으로 임한다기보다는 복음의 말씀으로 임합니다. 물론 처음에 오신 갈릴리 나사렛의 예수님이나 나중에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이 같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처음 오실 , 하나님의 나라 땅에 처음 임할 때는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을 천국 말씀이라고 부르십니다 (마태복음 13:19). 말씀은 씨앗 같습니다. 씨앗은 땅에 심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딱딱하고 볼품이 없는 검은 알갱이들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씨앗을 좋은 땅에 심고 정성을 들여 키우면 씨가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경외하고 하신 말씀들을 소중히 마음에 지켜 순종하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주님의 말씀이 모든 면에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며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권능으로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능으로 임하기는 커녕,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권세자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겸손히 낮아져서 오직 말씀으로 온유하게 권고하시는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듣습니다. 보스턴 시내의 번화가인 Boylston Street Chick-Fill-A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식당 앞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있고, 음식 배달을 하는 운전자들도 많이 모여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주차 공간이 많지 않은 이곳에서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더블 파킹을 하는 통에 차선 하나를 이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뜩이나 붐비는 거리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주차 위반이 어찌나 심한지, 가에 따로 더블 파킹을 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운전자들은 대부분 경고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차 단속을 하는 공무원들입니다. 이들은 하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다가와서 불법 주차된 자동차의 앞뒤를 오가며 위반 사항을 입력하고는 사정없이 벌금 티켓을 뽑아서 선명한 오렌지 봉투와 함께 앞유리창에 붙여놓습니다. 주차 단속원이 나타나면 갑자기 거리가 아수라장이 됩니다. 모르고 있다가 벌금 티켓을 받은 운전자들은 단속원을 붙들고 항의를 하거나 번만 봐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 해서는 꿈쩍도 않던 사람들이 벌금을 내리는 권세를 가진 공무원들 앞에서는 이렇게 한없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작은 권세조차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말씀으로만 우리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임하신 예수님은 겸손하시며 온유하심이 끝이 없으십니다. 오직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타이르시고, 말씀으로 책망하십니다. 종당에는 심지어 입도 닫으시고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이사야 53:7) 잠잠히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작은 씨앗과 같이 볼품 없는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신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에게 도전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듣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로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 부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권능이란 권능을 가진 사람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권능자이십니다. 왜냐하면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하십니다 (마태복음 24:35). 베드로전서 1:24-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말씀이니라.”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이미 창조주이시며 만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권능이 깃들어 있습니다. 권능은 마귀가 가진 죽음의 권세 아니고 오히려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귀신 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생명의 권세입니다. 살리는 생명의 권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 속에 역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5:25).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하십니다 (요한복음 6:63). 예수님께 죽음 잠시 맛보고 경험하는 과정인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또한 죽음이 그렇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영원하시며, 듣는 자를 살리시며, 그의 안에서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말씀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권능이 없이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권능을 작고 볼품 없는 씨앗 속에 숨기고 있으며, 오직 말씀의 씨앗을 듣고 받아 마음에 품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은밀하게 역사하는 권능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 것은 인자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심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사건은 명백히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자들도 있느니라하십니다. 이는 장차 완전하고 영원하게 임할 하나님의 나라 제자들이 미리 보고 경험할 있도록 하시는 예고편이라고 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에 대해서 심히 근심하며 깊은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죽음의 그늘을 벗어버릴 영광스러운 비전이 필요했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건이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셔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 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성령께서 제자들 가운데 임하신 , 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천하에 복음을 전파한 일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죽음대신, 그리고마귀대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왕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는 이미 안에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임하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가 소망으로 바라는 것은 마지막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왕이 되실 아니라 천하와 만민들의 왕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오실 , 주님을 무시하고 말씀을 듣지 않은 세상은 아수라장이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오심이 모든 말씀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승리의 날이 됩니다. 오늘 설교의 맺음말로 이에 관해 사도 베드로가 남긴 말씀을 읽겠습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날에는 하늘이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지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하늘과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저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후서 3:10-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