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 (사무엘상 16장)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
사무엘상 16장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부르시며 그에게 기름을 붓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브라함과 더불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추앙 받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을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founder)라고 한다면,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의 시조라고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시작 부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의 계보가 나오는데, 이 계보에서 오직 다윗에 대해서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왕들이 이 계보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에 대해서만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합니다 (마태복음 1:6). 이는 다윗이 “여러 왕들 중 하나(one of the kings)”가 아니라, “그 왕(the King)”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다윗은 장차 올 그리스도의 뛰어난 모형(model)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다른 이름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 12:35).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16). 과연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포함하여 사무엘상 16-17장은 이런 위대한 인물 다윗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매우 의미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장들을 공부함으로써, 다윗은 어떤 사람이며 왜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으셨는지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16장을 통해서, 다윗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입니다 (16:1). 그는 위로 일곱 명의 형들을 두었으며 (16:10),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들 중 제일 어린 막내입니다 (16:11). 다윗이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대체로 그 때 다윗의 나이가 14-15세 정도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17장에 보면 거인 골리앗이 그와 싸우러 나오는 다윗을 보고 그의 “어리고 앳된 모습”에 그를 업신여겼다고 합니다 (17:42). 다윗은 한 눈에 봐도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공식적인 직업은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16:11절에 선지자 사무엘이 아버지 이새에게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고 물을 때, 이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또 19절에서 사울의 사자는 다윗을 가리켜 “양치는 네 아들 다윗”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목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수금을 잘 타는 예술가였으며, 호기와 무용이 있는 용사였으며, 구변이 뛰어난 지혜자요, 또한 용모가 준수한 자였습니다 (16:18). 더 나아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16:18). 이러한 다윗의 인적 사항은 흥미롭습니다. 그는 양면성을 가졌습니다. 한 편으로 그는 가난하고 천합니다 (사무엘상 18:23). 그는 시골 베들레헴의 촌부인 이새의 여덟 아들들 중 막내로 들에서 양을 치는 일을 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그는 고상하고 위엄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지혜롭고, 용기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자였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시골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마태복음 13:55) 또 친히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3). 동시에, 누가복음 2:52절은 어린 시절의 예수님께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는 위에서 다윗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가지 사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의 중심,” 곧 “그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을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새의 아들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 베들레헴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이새의 장남인 엘리압을 보았을 때, 사무엘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마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엘리압에 대한 사무엘의 반응과 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아마도 엘리압은 키가 크고 용모가 뛰어난 듯 합니다. 그의 외모는 심지어 선지자 사무엘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 곧 “마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새의 일곱 아들들을 제치시고 막내인 다윗을 택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3:14절에서도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사울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곧 다윗은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3:22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다윗은 어떤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에 가서 이새의 아들 중 한 사람 곧 하나님께서 새 왕으로 택한 자에게 기름을 붓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무엘은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16:2). 이 사무엘의 말은 사울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울은 이제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좇는 자가 되었습니다. 본래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둘 다 버렸습니다. 곧 하나님도 버리고, 하나님의 뜻도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자신의 욕심과 시기심을 따라 왕권을 휘둘렀습니다. 심지어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종이라도,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라도,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자라면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죄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 (self-centeredness)”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높여 스스로 왕이 되며,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데 온 마음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이 거할 자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에게 “원수”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사울 왕의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다윗은 어떨까요? 예전에 신학대학원의 한 과정에서 구약의 책들을 읽고 각 책을 대표하는 핵심 요절(key verse)을 찾아내는 과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사무엘상/하서에 대해서 선택한 요절은 사무엘하 5:12절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다윗의 마음 속에 하늘의 별처럼 높이 떠서 항상 밝게 빛나며 그의 삶을 지도하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의 지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의 나라를 높이신 것”입니다. 다윗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신 것은 그가 아직 어린 소년일 때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다윗의 인생에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도 그의 삶에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새의 막내 아들로 들에서 양을 치며, 아버지의 심부름을 다녔으며, 형들의 괄시를 받으며, 기껏해야 사울 왕의 병기 든 자가 되어 그를 위해 수금 타는 일을 하는 “졸병”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거의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다윗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과시하거나 또는 이를 근거로 왕권을 행사한 적이 없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곧 하나님께서 그의 주요 왕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30세의 나이에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사무엘하 5:4). 그가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이는 그에게 참 왕은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오직 이 여호와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는 그가 왕이 되었을 때 훨씬 더 중요하고 절실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영원하시고 참되신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또 명심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의 나라를 높이신 것”입니다. 다윗 왕국은 이스라엘 역사의 황금기였습니다. 그의 통치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롭고, 평화롭고, 또 영광스러웠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번영을 자신의 손으로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높이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곧 다윗이 보기에 자신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신 에이전트(agent)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마음은 다윗을 향한 것이 아니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섬겼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나의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이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고, 또 그 뜻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자신의 왕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기뻐하시고, 그의 나라를 높이셨습니다. 이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다는 것은 이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곧 다윗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한 왕이요 주로 계셔서 늘 그의 삶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그것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서, 늘 그것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속담에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에도 “Love me, love my dog”라는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 특히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들도 함께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의 소중한 것들을 함께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사랑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전하시는 유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더하여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치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양이 하나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내 양”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또한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내가 그들을 돌본 것처럼 돌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그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신 이유인 것입니다.
사무엘이 새 왕을 찾아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의 아들들을 초대했을 때, 다윗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고 묻자 이새가 대답하기를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말하기를 다윗이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것은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린데다 형제들 중 말째이고 또 그가 “천한” 양치기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 자리에 올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충성스럽게 돌보았습니다. 그는 한 순간도 이 양들을 위험한 들판에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사무엘상 17:34-35절에서 다윗은 사울 왕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양들을 돌보았는가에 대해 이렇게 간증합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다윗은 양떼를 지키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그리고 맨손으로 맹수들과 싸웠습니다. 다윗은 늘 들판에서 혼자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헌신적으로 양을 돌본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아시고 그를 왕으로 부르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부르시고, 사무엘 앞으로 인도하시고, 기름 부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하는 “믿음”입니다. 오직 이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외모를 보는 세상의 판단”을 이겨내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무엘 앞에 인도하시고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이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형제들 앞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날 이후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다윗의 기름 부음을 받기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랜드마크가 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합한 자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성령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한 다윗과는 반대로, 사울에게서는 여호와의 신이 그를 떠나고 오히려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6:14). 그는 스스로 왕이 되어 모든 것을 갖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자신의 영혼”조차 악한 영에게 빼앗기고 귀신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결국 나라도 잃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자신의 생명도 잃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왕으로 모시고 오직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의 최후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까요? 다윗은 그의 전 인생을 들에서 아버지의 양을 치며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고,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손에 쥔 목자의 지팡이가 전부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깊이 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성장하며, 성령의 충만함에 이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