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에스더에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2. 11. 29. 14:42

마리아, 에스더!

밖에 비가 오는구나.
올 봄에는 비가 참 많이 온다.
아빠는 비 오는 날이 좋단다.
뭔가 깨끗해지고, 차분해지고 뭐 그런 느낌...

오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보자.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하는데 이 가운데 27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 앞에는 눈에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가 있었다.
"보이는 자"는 임금 곧 애굽왕 바로이며
"보이지 않는 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데리고 나오라고...
하지만 바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몹시 화를 냈다.

당시 애굽왕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임금을 화나게 했다면
세상에는 그 사람을 그 임금의 노함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곧 죽음이지.
바로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였다.

그런데 모세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니?
그는 이 바로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가 노예로 부리던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땅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어떻게 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27절 말씀에서와 같이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참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보이는 바로"를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마리아, 에스더야!
"보이는 바로"를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바로 믿음이란다.

모세와 정반대로 행동한 사람도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예"라고 할 수 있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다.

사무엘상 13장에서
사울의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양쪽에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었다.
블레셋 군대의 수가 너무 많아서 마치 해변의 모래와 같이 새까맣게 땅을 덮었다.
이를 본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부는 흩어져 숨고
일부는 두려움에 떨었다.

앞에서 본 "노한 애굽 임금" 만큼이나 무서운 상황이지.
더구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사무엘마저 약속한 기일까지 오지 않자
마음에 두려움이 생긴 사울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리게 된다.
이 일에 대해 사무엘은 "사울이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한다.

언뜻 보면 사울의 행동을 이해할만도 한데
사무엘은 이를 몹시 책망하면서
심지어 그의 왕권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는 사울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눈 앞에 보이는 블레셋 군대"에 대한 "두려움"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사울에게는 "보이는 블레셋 군대"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무서웠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다.
사람은 "가장 무서워하는 것"에 순종하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도 만일 하나님의 명령보다 애굽왕의 노함을 더 무서워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서 그랬을 것이다.
"바로왕이 안 된다는데요?"

마리아, 에스더야!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대개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믿고, 자랑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말도 있잖니.

하지만 정말 가치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앞에서 말한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 구주 예수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하나님 나라, 그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약속들,
무엇보다도 우리의 육체 안에 거하는 내 영혼...

크리스찬들이 자주 쓰는 말들 중 하나가 "영적이다"라는 말이다.
"영적이다"라는 말의 뜻을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예들이 많이 있다.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중히 여기고 산에 머물렀지만
롯은 보이는 "풍요로운 요단 들"을 좋아하여 평야로 내려갔다.
야곱은 보이지 않는 "장자권"을 더 중요하게 여겼지만
에서는 보이는 "팥죽 한 그릇"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자.
마가복음 13: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성전의 장대하고 화려한 건물에 압도된 제자들 중 하나가 예수님께 말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의 눈에는 이 화려하고 장대한 건물이 감탄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파괴될 그것의 장래를 보시며 슬퍼하셨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에 속았지만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셨다.
제자들은 "육적"이고 예수님은 "영적"이셨다.

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또는 "영적인 것"보다
"보이는 것" 또는 "육적인 것"에 더 큰 가치를 둘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또 사울왕을 "바람직하지 않은 예"로 들어야겠다.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왕에게 명하시기를
아말렉이라는 나라를 쳐서 진멸하고 모두 죽이라고 명하셨다.
사울이 이 명령을 수행했지만 완전히 순종하지는 않았다.
아말렉 왕 아각과 또 모든 좋은 것들 예를 들어 기름진 양과 소를 남겼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보내 사울을 책망하셨다.
그러자 15:14절에서 사울은 이렇게 변명한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것들"은 아까우니 남기자는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단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인기 있는" 왕이 되고 싶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하고 돌이키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았다. 너무 세게 잡아 옷이 찢어졌다.
그런데 이것은 용서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15:30절에 보면 사울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울의 관심은
오직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울에게는 심지어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조차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명예에 관한 문제였다.

사울은 항상 "보이는 사람" 앞에서 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무시했다.

사울왕이 어리석은 자이기는 하지만 이해할만하다.
왜냐하면 우리도 자주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니까.

사람은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이는 것을 자랑하고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보이는 것들"을 거부하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예수님에 관한 예언시이다.
이 가운데 2절 말씀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와는 매우 대조적인 말씀도 있다.

골로새서 2:2-3절 말씀이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시며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우리가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육적인" 사람이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사랑하거나
예수님 안에 있는 보화를 찾을 수 없단다.
예수님은 "눈에 보기에" 좋은 것들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시니까.

하지만 우리가 "보이지 않는"것을 추구하는 "영적인" 사람이면
예수님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들
곧 온갖 진기하고 보배로운 지혜와 지식들을 발견하게 된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의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육적인 사람"에게
십자가는 수치요, 실패요, 저주요, 죽음이요, 멸망이다.
그는 아주 멀리 멀리 머~얼리 도망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온갖 진기한 보화들을 숨겨 놓으셨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의 욕된 육체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치료,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언약,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좁은 문,
세상과 죄와 죽음과 사단을 이기는 능력,
우리를 의롭게 정결케 하는 주님의 물과 피가 끊임없이 흐르는 생명 나무,
.....
.....

마리아, 에스더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좋은 것들은
"보이지 않게" 감추어 놓으셨단다.

너희들 속에도 이 보이지 않는 좋은 것들이 있단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과 은혜,
그리고 그 신령한 역사로 인해 늘 새롭게 변해가는 너희 속사람 (새사람)...

참으로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마리아, 에스더야!
결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 자랑하려고 하지 말거라.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지 말거라.

"보이는 것"들은 다 사라질 것들이다.
그것들로 인해 울거나 웃거나 하지 말아라.
그것들에 속지 말아라.

오히려 예수님처럼
너희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비밀"로 소중히 지키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하나님과 함께 은밀하게 즐기거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더욱 신령한 복으로 축복하실 것이다.

너희가 이렇게 "영적인" 사람들이 되도록
너희를 위해서 늘 기도한다.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