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믿음이란
마리아, 에스더야!
지난 성경 공부에서
요한복음 4장 끝 부분에 나오는
왕의 신하의 믿음에 대해서 배웠지?
오늘은 그 이야기를 기초로
"믿음"에 대해서 얘기해야겠다.
우리가 알 듯이
(그리고 사실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축복하신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늘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공부한 말씀에서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와서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부탁한다.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찾아 먼 길을 걸어왔고
또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 겸손하게 부탁을 드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신다.
뭔가 책망하시는 듯한 말씀이지.
그리고 뭔가를 원하시는 말씀이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가만해 생각해보면
"믿는다"는 것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단다.
"그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가" 또는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선 배울 수 있는 것은
"표적과 기사(miraculous signs and wonders)"를 보고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단다.
믿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냥 믿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예를 들어,
너희들이 아빠에게
"아빠! 우리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데
아빠가 "그래? 믿을 수 없어. 성적표를 보여 봐!"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쁘겠지?
아마도 너희들이 바라는 것은
아빠가 너희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는 것이지.
심지어는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말이야.
그렇단다.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다.
아무런 보이는 증거가 없더라도 말이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일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공부한 내용에서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하고 재촉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그냥 보내시면서
그냥 "말씀"만 하신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같이 가시지는 않는다.
왕의 신하의 입장에서 보면
뭔가 일이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예수님을 모시고 가기 위해 먼 길을 왔는데
"빈 손"으로 돌아가게 됐으니까.
하지만 사실을 그게 아니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요한복음 4:5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자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쓰여 있다.
전에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다.
이것은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분 자체를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를 원하신단다.
눈에 보이는 아무런 다른 증거가 없어도 말이다.
심지어 반대의 증거가 있더라도...
가장 훌륭한 예는 바로 아브라함이지.
창세기 1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하나도 없었어.
더구나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나이가 점점 들어
결국에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단다.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되었지.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단다.
로마서 4:19-22절 말씀이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정말 대단하지 않니?
그는 믿음이 없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해졌단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렇게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잘 알았기 때문이란다.
아브라함이 "좋은 믿음" "강한 믿음"을 가졌다기보다는
아브라함이 "좋으신 하나님" "강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지.
마리아, 에스더야!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시고
정말 강하신 분이시란다.
하나님은 한 마디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영광스러운 분께
그 "영광에 걸맞는"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큰 "죄"야!
가만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은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다.
늙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도 어렵지만
이제 더 나이가 많아진 아브라함이
"있는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 반납하는 것"은 더욱 어렵지.
아빠라면 차라리 "주님! 제가 대신 죽으면 안될까요?"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단다.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말이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식을 죽여 바치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다음은 히브리서 11:17-19절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혼자 앉아서 가만히 생각(reasoning)을 해 본거야.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자손을 번성케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제 이삭을 죽이라 하시다니?
아!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시겠구나!"
앞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죽은 자 같은 늙은 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실 것은 믿었단다.
이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에게는
"죽은 자 같은 늙은 몸"이나 "죽음" 자체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강하신 거야!
하나님께서 더 강하신 거야!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이야.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야.
마리아, 에스더야!
모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좋은 믿음" "강한 믿음"을 갖기를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갖기 위해
뭔가 "믿을만한 것"을 구한단다.
유대인들이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것처럼 ...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믿을만한 것"을 기초해서 믿는 믿음이 아니란다.
그것은 사실 "믿음"이라고 할 수 없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믿을만한 것"이 전혀 없을 때 믿는 믿음이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왜냐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게 전부란다.
그리고 그게 진정한 믿음이란다.
사랑하는 마리아, 에스더야!
아빠가 전에도 말한 것처럼
"좋은 믿음" "강한 믿음"을 가지려고 하지 말고
"좋으신 하나님" "강하신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내 믿음"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라.
믿음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말들을 해야 할 것 같다.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