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두 가지 문제
마리아, 에스더야!
날씨가 정말 덥구나.
너무 더워서 아침 일찍 깼다.
집에서 나와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성경 말씀은 거의 항상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단다.
하나님과 노아,
하나님과 아브라함,
하나님과 모세,
하나님과 다윗, ...
이처럼 사람들은 바뀌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성경 말씀의 주인공이시란다.
성경 말씀에서뿐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항상 주인공이시다.
로마서 11:36절 말씀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from him)
주로 말미암고 (through him)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to him)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마리아, 에스더야!
이것은 너희들 각자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너희 인생의 주인이시고
너희 인생의 주인공이시란다.
이것을 명심하거라.
이것을 잊지 않고 명심하면
너희들의 일생이 안전할 것이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며 "주인공" 되심을 잊은데서 오는 것이다.
로마서 1:21절에 기록된 그대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 되시며
내 인생의 "주인공" 되심을
잊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빠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앞에 인용한 로마서 말씀에서와 같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오늘 아빠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내게 주신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충만하면
우리 마음이 늘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게 된단다.
마리아, 에스더야!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 생활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늘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는 더 자주 하는 것 같다.
감사를 하더라도 "아주 잠깐 동안"만 하는 경우가 많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어려운걸까?
성경 말씀에 따르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단다.
그것은 "욕심"과 "시기심"이다.
이 두 문제들을 보여주는 예들은
성경 안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단다.
아주 맨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욕심"내어 먹은 아담과 하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인 가인, 등등...
좀 더 마음에 와닿는 예를 볼까?
"요나" 선지자다.
요나서를 읽은 적이 있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었던 그 분이다.
요나서 4장을 읽어보면
요나가 하나님께 심하게 불평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두 군데다.
한 군데는 4:1-3절인데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라고 쓰여 있다.
요나가 무엇을 그렇게 심하게 싫어하고 노했을까?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읍 사람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아끼셨기 때문이다.
또 한 군데는 4:8,9절인데
"...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라고 불평한다.
이번에 요나가 화를 내는 이유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박넝쿨이
하루밤새 말라버려서 몹시 더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요나에게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고 물으신다 (4:4,9)
요나가 불평할 이유가 없는데 불평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왜 요나가 불평할 이유가 없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박 넝쿨에 대하여
4:1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박 넝쿨은 요나의 것이 아니란다.
요나가 그것을 심은 것도 키운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시고 키우신 것이다.
박 넝쿨은 하나님의 것이다.
물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박 넝쿨이 하룻밤 새 없어졌으니
불편하고, 아쉽고, 섭섭하기도 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신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지.
오히려 잠시나마 시원한 그늘을 즐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
"고마웠습니다"라고 해야지.
니느웨 성읍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란다.
4:1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아끼신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물들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인이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모든 것들의 (우리들을 포함해서) "주인"이시며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을 포함해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갖고 계신단다.
하지만 요나는
그런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했단다.
그의 "욕심"과 "시기심" 때문에.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
마태복음 20:1-16절은
예수님의 여러 천국 비유들 중 하나로, 여기서는 천국을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으로 비유하신다.
포도원 주인이 밖에 나가서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아서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기로 하고 일을 시켰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일을 했고
어떤 사람은 오후 서너시가 되어서야 들어와 일을 시작했단다.
저녁이 되어 품삯을 줄 때
주인은 늦게 들어와 짧은 시간 동안만 일을 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돈을 주었다.
일찍 들어와 하루 종일 일을 한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우리는 더 많이 일을 했으니 더 많이 받겠지"하고 기대를 했단다.
그런데 주인은 이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주는거야.
그러자 이들은 집 주인을 원망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들의 말이 틀리지 않지?
더 고생을 했으니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니?
하지만 주인은 이들의 원망에 대해서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인이 일찍 온 사람들에게 약속한 금액은 한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 당시에 일반적인 하루 품삯이라고 한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지불했단다.
아무런 문제가 없지?
오히려 주인이 아니었더라면
하루 종일 빈둥거리다가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밖에 없지.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주인에게 "고맙습니다" 해야지.
그런데 왜 이들이 주인을 원망하게 되었을까?
주인이 늦게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더 받을 줄로" 생각한 거야.
"욕심"이 생긴거야.
그리고 더 받지 못했을 때 주인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거야.
주인의 은혜를 받은 늦게 온 일꾼들을 "시기"한 거지.
14,15절에서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다.
주인은 "주인의 것"을 "주인의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단다.
그리고 주인이 늦게 온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은
"악한 일" 또는 "불공평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일"이다.
왜 칭찬을 받아야 할 선한 일이
원망을 사는 "악한 일"이 되었을까?
이것은 일찍 온 일꾼들의 마음 속에 생긴
"욕심"과 "시기심" 때문이다.
요나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잠시나마 그늘을 만들어 주신 것,
회개하는 니느웨 성읍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
모두 하나님의 "착하신 일들"이란다.
하지만
요나의 "욕심"과 "시기심"이
이러한 하나님의 "착하신 일들"을
요나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불만스러운 일들"로 만들었단다.
이렇게 우리 속에 있는
"욕심"과 "시기심"은
무서운 것이란다.
욕심의 정체는 대체 뭘까?
골로새서 3: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기서 "탐심(greediness)"이 곧
우리가 말하는 욕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탐심"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가진 것보다 더 원한다 (want more)"라고 한다.
에베소서 4:19절에는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욕심"이라는 단어를
NIV 영어 성경은 "continual lust for more"라고 번역해 놓았다.
아마도 그리스어로 쓰여진 성경 원문을 문자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아빠가 하고 싶은 얘기는
"욕심"을 한 마디로 말하면
"더 갖기를 원하는 것 (want more)"이다.
포도원 일꾼들처럼
주인의 부름을 받아 일하고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더 원하는" 욕심은 끝이 없단다.
심지어 또 다른 비유에 보면 (마태복음 21:33-41)
고용된 포도원 농부들이
아예 포도원을 차지하고자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며
마침내는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일을 저지른단다.
이것들을 보면
앞에서 인용한 골로새서 말씀에서
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했는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지.
"사람의 욕심"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그 "다른 주인"이 누굴까?
바로 "나"야.
"나"가 원하는 것을 가져야 하고
"나"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복을 받아야 해.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란다.
아주 무서운 죄란다.
마리아, 에스더야!
하나님이 주인이시란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소유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 마음대로 하신다.
너희들의 생명을 포함해서
너희들이 가진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주신 것들이며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도로 가져가실 수 있단다.
혹시 욥기에 나오는 욥의 말을 기억하니?
동방의 가장 큰 부자였던 욥이
한꺼번에 자식들과 모든 재산을 잃었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 1:21)
이어서 욥은
심한 병에 걸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아프게 되었단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기 2:10)
마리아, 에스더야!
모든 것을 감사하거라.
심지어는 어려움까지도 말이다.
그래도 너희들이 감사하기 어려우면
이 사람을 생각해라.
누가복음 16:19-31절에 있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 얘기에 나오는 그 부자다.
이 부자는
이 세상에서는
아주 행복하게 살았는데
죽어서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단다.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을 받던 그는
멀리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보고
나사로의 손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적셔달라고 한다.
아주 고통스럽게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부자에게는
"한 방울의 물"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무런 "은혜"도 주어지지 않는다.
순전히 고통 뿐이다.
마리아, 에스더야!
이 부자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모두가 이 부자처럼 될 수 밖에 없단다.
심지어는 "한 방울의 물"도 하나님의 은혜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겨우 혀 끝을 살짝 적시는 "한 방울의 물"이 아니지!
우리 속에 영원하도록 솟아나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샘물"이지!
이 생명의 은혜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부어주시는
은혜들을 다 셀 수도 없단다.
이 은혜에도 불구하고
뱀이 에덴 동산에서 여자를 유혹한 것처럼
사단은 언제나 우리에게 "더 원하도록" 유혹한단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비교하도록" 유혹한단다.
마리아, 에스더야!
이런 유혹을 지혜롭게 이기는 유일한 길은
항상 하나님께서 너희 인생의 "주인"이시며
너희 인생의 "주인공"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과
너희 가운데 행하신 일들에 대해 감사하거라.
하나님을 찬양하거라.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거라.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감사하는 목소리"(요나2:9)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들으실 것이다.
마리아, 에스더가
항상 "욕심과 시기심"을 이기고
"감사와 기도"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기도한다.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