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에덴 동산 (창세기 2:4-1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5. 7. 3. 11:41

에덴 동산

 

창세기 2:4-17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를 위해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은 자주 천국이나 낙원 같이 이상향 의미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실제로 오늘 말씀은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누렸던 낙원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낙원은 우리가 누렸던 것이며,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회복해야 낙원의 원형(prototype)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천국을 찾는 우리의 신앙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마음 속으로 그리며 추구하는 낙원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위험이나 위협도 없는 안전함,”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부족함이 없이 누릴 있는 풍요로움,”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평화이런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낙원의 필수 요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설 Lost Horizon 나오는 티벳 깊은 산속의 이상향 Shangri-La Thomas More 그린 이상향인 섬나라 Utopia 등은 이런 사람들의 낙원에 대한 생각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적인 안전함, 풍요로움, 평화가 확보될 안에서 낙원의 행복한 누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평생 수고하고 고생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낙원을

해하고 추구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체로 모순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절대적인 안전함과 풍요로움과 평화를 가진다면, 그것이 나의 낙원이며, 이로부터 나는 행복한 안전하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것이다.” Thomas More Utopia 이런 글이 있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물건에 대해 권리를 갖는다. 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창고에 항상 물건이 가득 차도록 유지하는 , 어떤 개인이 어떤 물건을 욕심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In Utopia, where every man has a right to everything, they all know that if care is taken to keep the public stores full, no private man can want anything).” 말에 따르면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개인들이 절대적인 풍요로움 누립니다. 그런데 풍요로움은 공동 창고의 풍요로움에서 나옵니다. 공동 창고가 어떻게 채워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낙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낙원 대해서 다르게 말씀합니다. 물론 그곳은 안전하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땅입니다. 하지만 안전과 풍요로움과 평화는 낙원의 조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설교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2:4-6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더라.”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의 셋째 이미 땅을 창조하시고 그곳에 각종의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이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아직 들에 채소가 없었고 밭에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으며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셨지만, 땅에 식물들과 동물들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땅을 경작하고 관리하는 사람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천국의 시작은 바로 일하시는 하나님(God who is working),”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People working with God)”입니다. 신명기 28:12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요한복음 5:17절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십니다. 천국은 어떤 상태(state)” 아니라 역동적인 작용(dynamic work)”입니다. 천국은 없이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체(organic body)”입니다. 그리고 움직임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비를 내리실 천국이 계속해서 살아 움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천국을 누리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을 위해 많은 재물을 창고에 쌓아놓고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영혼아 여러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는 풍요로움에서 천국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에 비를 내리시고 그의 소출을 풍성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풍요로움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생명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 쌓아둔 재산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7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빚으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령 살아있는 존재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실 땅이 비로소 생명들이 번성하는 살아있는 생태계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실 사람이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하늘에서 때를 따라 비를 내리는 것처럼 사람은 생명을 위해 항상 하나님을 호흡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을 호흡함으로써 유지되고 힘을 얻습니다. 제가 어렸을 어머니는 텃밭에서 키운 채소들과 들에서 채집한 나물들로 반찬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채소들과 나물들은 너무 흔해서 손만 뻗으면 쉽게 얻을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입에는 동네 상점에서 파는 과자나 사탕이 맛있고 달콤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원하는 만큼 사먹을 없었기에 눈에는 그런 가공식품들 더욱 귀하게 보였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저는 어리석게도 몸에 좋은 유기농 채소와 나물들은 싫어하고 대신 몸에 좋지 않은 과자나 사탕을 탐했던 것입니다.  Thomas More Utopia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직 그것들이 희소하다는 이유로 금과 은의 값어치를 한껏 올려놓았다 (The folly of men has enhanced the value of gold and silver because of their scarcity).” Thomas More 통찰력을 빌려서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은 찾기 어렵도록 깊은 곳에 숨겨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평생 자신의 허영심에 속아 그것들을 쫓아다니면서 생애를 허비하도록 버려 두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에 필수적인 흙과 물과 공기는 풍성하게 제공하십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들은 이것들을 먹고, 마시고, 호흡하면서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누리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삽니다. 사도행전 17:2b절에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자이심이라.” 28a절에서는 말씀하기를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합니다. 우리가 살며, 일하며, 존재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에게 생기를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7절이 말씀하는 생기 (breath of life)”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설명하기를 어려울 것입니다. 인터넷에 게시된 야훼, 생명의 호흡 (YHWH the Breath of Life)”이라는 글을 보았는데, 글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 소리가 마치 사람이 숨을 들이쉬고 (-) 내쉴 (-) 내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순간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그의 함께 하심을 의식하며, 생명의 능력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희소한 금이나 은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구하며 가난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있습니다. 거기에 항상 하나님의 기운 (Breath of God)” 있어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우리는 오직 기운을 의지하여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을 위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 두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셨습니다. 10-13 말씀에 따르면 에덴 동산에는 근원이 있어서 이것이 동산을 적시고 갈라져서 강물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강의 이름은 각각 비손, 기혼, 힛데겔 그리고 유브라데였습니다. 에덴 동산의 물이 강물 근원이 되었다는 것은 물이 흘러 세상의 땅을 적신다는 의미입니다. 에덴 동산은 자체로 천국이지만, 또한 세상에 생명의 물을 공급하는 근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해낸 이상향인 Shangri-La Utopia 가지 특징은 그것들이 높은 산이나 깊은 물로 둘러 싸여 있어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채로 자신들끼리 폐쇄적인 영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천국을 세우고 누리기 위해서 주위에 높은 담을 쌓고 스스로를 격리시킵니다. 유대인들은 자주 자신들을 만민의 제사장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주위에 높은 담아 쌓아놓고 이방인들을 배척했습니다. 오늘날 미국도 주위에 높은 담을 쌓고 하나님께서 땅에 내리신 복이 이웃 나라들로 흘러가는 물길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산은 세상을 품고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천국 선물하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세상에 천국의 축복이 흘러가기를 기대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2-3).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를 사람을 낚는 어부 되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19). 바울을 부르셔서 그를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할 그릇으로 쓰셨습니다 (사도행전 9:15). 폐쇄된 천국은 마치 썩은 물이 고인 저수지와 같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천국의 시민은 가장 높은 곳에서 오직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고 의지하며, 받은 은혜를 아낌 없이 이웃들과 나누며 세상을 적시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들에게 풀기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셨을까요? 아마도 동산에 거하는 사람은 매일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를 보면서 같은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셨을까?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셨으니 먹지 말아야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계명은 매일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옳으심,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선포합니다. 사람은 마음 속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옳으심,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인정하고 이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 없는 노인으로 늙어버린 자신과 아내 사라를 보면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나는 무자하오니 내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창세기 15:2a).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여전한 마음 속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거하시는 동안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시며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하지만 선하신 삶의 끝은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고난 중에 예수님은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복음 15:34).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46).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8절에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미쁘시니라하며 20절에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되느니라합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을,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천국에 거하지만 매일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옳으심,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의문입니다. 간절한 소망이 좌절될 ,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을 , 오랜 기도와 기다림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을 , 우리는 자주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단호하게 “Yes” 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리가 여러 마음 속의 의문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안전하게 은혜와 사랑 안에 머물러 있도록 지켜주는 파수꾼과 같습니다.

 

낙원은 안전과 풍요와 평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낙원이 되시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안전과 풍요와 평화를 누릴 있습니다. 공기가 지구를 덮는 것처럼 그렇게 풍요롭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풍요로움 때문에 우리는 안에 잠겨 있으며, 없이 그를 숨쉬고, 마시며, 먹습니다. 우리의 낙원 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며, 받은 복을 이웃들과 나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으며 많이 갖기 위해 이웃들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낙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평화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낙원은 안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그의 선하심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죽어간다고 하더라도,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낙원이 되시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안전과 풍요와 평화를 누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