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창세기 17:1-27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장면들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2절에서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시고, 15:5절에서는 하늘의 수 많은 별들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시고, 또 오늘 본문에서도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하십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17장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시는 바 “언약(covenant)”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반복됩니다 (2, 4, 7, 9, 10, 11, 13, 14, 19, 21). 성경 전체를 걸쳐 언약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장입니다. 열 번 모두 하나님께서 그 입으로 직접 “내 언약” 또는 “나와 너 사이의 내 언약”이라고 언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은밀하고 조용하게 아브라함을 복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를 붙들고 여러 번 약속하시고 또 확인하시는지 참으로 의아합니다. 사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서로 언약을 맺을 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1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십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그 나이가 구십 구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늙어서 몸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젠 소망도 즐거움도 없이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늙어 죽은 자와 같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몸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약속입니다. 또 수 십년 동안 말로만 약속하시고 여전히 아들을 주시지 않은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언약”을 세우실 입장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은 성립되지 않으며 또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최소한 아브라함 쪽에서는 거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매우 진지하시고 단호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라(be blameless)” 하심이 정확히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내 앞에서 행하라” 하시는 말씀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6:9절에서도 노아에 대해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완전한 자로 일컬어진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 앞에 행함으로” 그 앞에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글래스고우 코마 척도(Glasgow Coma Scale)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환자가 외부의 자극이나 지시에 반응하는 정도를 통해서 그 환자의 의식이 얼마나 또렷한 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이 척도는 눈 반응(eye opening response), 언어 반응(verbal response), 신체 반응(motor response)을 측정합니다. 아래 그림은 그 중 언어 반응과 신체 반응의 측정 기준을 보여줍니다. 환자가 아무 의식이 없을 때는 자극이나 지시에 대해 언어적으로, 신체적으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의식이 또렷한 경우 “시간, 사람, 상황에 맞게” 말을 하므로 타인과의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며, 또 “지시에 따라” 움직임으로 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만으로도 함께 몸을 움직여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말에 대한 반응도 (responsiveness to words)”가 높다면 그 둘은 서로에게 완벽한 파트너가 되어서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많은 혼돈과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 대신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글래스고우 코마 척도는 사람의 의식의 반응도를 측정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사람의 영적 반응도(spiritual responsiveness)에도 그대로 적용시켜볼 수 있습니다. “영적 반응도”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1절부터 16절에 이르기까지 매우 길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여러가지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그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먼저 그의 아내 사래를 통해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아브라함은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창세기 18:11절에도,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자 이를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하시고, 둘 다 늙어 몸이 죽은 자와 같이 된 노부부에게 “아들을 낳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신들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를 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대신 입을 가리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 자신들의 늙고 쓸모없는 몸을 한탄하였습니다. 글래스고우 척도로 치면 “무 반응”은 아니지만 최소한 “상황에 맞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적절한 반응을 보이며, 부적절한 말을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영적 반응도는 “완전함”에서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완전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나의 실제 삶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신 그대로 받으며 또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완전함”을 내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물론 그 결과는 “실망과 절망”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신들의 늙은 몸을 보고 절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완전함”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전능한 하나님 (El Shaddai)”이라고 하십니다. “전능하다”는 것은 단지 “능력 (power)”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을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와의 관계에서” 사용하십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혹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all-sufficient) 하나님”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부족합니다. 능력에서, 사랑에서, 지혜에서, 거룩함에서, 의로움에서 정말 가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늙은 아브라함, 단산한 사라와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충만하십니다. 그리고 그 충만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부족함들을 넘치도록 채우십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전능하시며 나의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께 반응해야 합니다. 전능하시며 나의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약속들을 온전히 받고 믿어야 합니다. 그 약속들이 내 삶에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17:10-11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는 살의 일부를 베어내는 고통스러운 시술입니다. 창세기 34장에는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 사람들을 속여 그들로 하여금 할례를 행하게 한 후, 할례 받은 후 3일이 되어 그들이 “고통할 때에” 칼을 들고 성을 급습하여 모든 남자들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4:25). 할례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을 수반함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집에 속한 모든 남자들이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앞에 언급한 글래스고우 코마 척도에도 “통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체 반응 척도에서 의식이 또렷하지 않을 경우 통증 자극을 가함으로 이에 반응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주 사람들의 영적 의식을 깨우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십니다. 특히 사사기에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사기 2:2-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거민들 중 일부를 남겨두시고 이들을 가시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 무의식으로부터 깨우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 백성들의 영적 무감각함(spiritual insensitivity)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극한의 방법들을 쓰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할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행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영적 감각을 높이고 그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가 할례를 시행하도록 명하시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본문 23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날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적으로 깨어있음으로, 곧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여, 고통스러운 할례를 실시하였습니다. 자신의 살을 자르고, 자신의 피를 흘리며, 여러 날 계속되는 고통을 견뎠습니다.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의 몸 속으로, 그의 살과 혈관 속으로 깊이 뚫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직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은 이를 듣고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꽉 붙들고 이를 자신의 몸에 새겨넣은 것입니다. 그는 칼로 자신의 몸을 쪼개 그곳에 성전을 만들고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모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브라함은 고통을 당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그와 같이 큰 고통을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과 의인의 차이입니다.
죄인: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의인: 말씀을 들을 때, 고통을 감당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할례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그의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4:42, 25:13, 26:38 등). 특히 고난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태복음 26:41). 사람들의 삶은 영적으로 둔감해서 다만 고통을 피해 달아나는 맹목적인 달리기와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두려운 소식들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고통을 찾아서 감당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있거나 또는 최소한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당장 아무런 유익도 없이” 혹은 “400년 후에나 일어날 어떤 것을 위해서”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무반응”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무서운 적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아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시들이 예수님을 위협하거나 두렵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 “무반응”으로 반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 곧 “하나님의 뜻”에만 반응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것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의미함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할례는 “자신의 죽은 몸에 대한 그의 무반응”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그의 온전한 반응”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고난은 “유혹과 협박에 대한 무반응”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반응”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으라!” 하시는 말씀의 뜻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내 몸에 새기고 그 언약을 몸 안에 모셔 놓는 행위입니다. 그리할 때, 내가 그 안에 생명의 말씀을 품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씨앗이 됩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씨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이 예수님의 몸 안으로 온전히 영접되고, 새겨지고, 또 그 몸을 성전으로 하여 그 안에 모셔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몸의 모든 세포 속으로, 그 피의 모든 흐름 속으로 깊이 스며든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유효하게 된 것이며, “심지어” 그 약속들이 예수님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사래에서 사라로 바꾸셨습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제 그들이 더 나은 사람, 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이전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그의 몸에 봉인되면서, 그는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그 말씀에 반응함으로, 완전한(blameless)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수정된 (fertilized) 거룩한 씨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아들 하나 없는 늙은 노인이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반응함으로 완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으로 우리도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우리도 자비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심으로 우리도 빛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도 베풉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우리도 용서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심으로 우리도 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함으로 완전하신 하나님(blameless God)께서 내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함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 완전한 사람(blameless man)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합니다 (로마서 14:23b). 또 말씀하기를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하나님의 뜻에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세우신 새 언약으로 수정된 (fertilized) 거룩한 씨가 되시며, 이 씨는 우리의 생명과 거룩함을 위해 우리 각자에게 뿌려집니다. 마가복음 8:3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우리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 반응하지 말고 예수님과 그 말씀에 큰 기쁨으로 반응함에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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