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12:20-33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죽음은 단순히 몸 속의 생명의 현상들이 중단되는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죽음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죽도록 힘든” 경험들을 포함합니다. 고린도후서 2: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곧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합니다. 그는 “매일 죽는 삶”을 통해서 (고린도전서 15:31) 주위 사람들에게 이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향기가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이며,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 각자의 신앙의 척도는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에서, 혹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어떤 냄새를 맡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의 냄새”를 맡는 사람은 그 냄새를 좇을 것이며, “죽음의 냄새”를 맡는 사람은 그 냄새를 두려워하고 멀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한 사람은 생명에 이르며, 다른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우리의 삶이 여전히 죽음의 냄새에 쫓기며 괴롭힘을 당하다가 멸망에 이르는 비참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아시고, 그것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의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자신의 죽음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많은 열매”를 말씀하시며,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말씀하시며, “마귀에 대한 승리”를 말씀하시며, “온 세상 영혼들의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들이 모두 예수님의 몸 안에 빼곡하게 싸여 있으며, 주님의 죽으심으로 이 진리들이 활짝 피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Hope for the Flowers)”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Trina Paulus라는 분이 쓴 이 책은 줄무늬 애벌레(Stripe)의 인생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뭇잎을 갉아먹으면서 무료한 삶을 살던 줄무늬 애벌레는 어느 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던 중 멀리 높이 솟은 기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기둥은 너무 높아서 그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가려질 정도였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놀랍게도 그 기둥은 수 없이 많은 애벌레들이 모여서 서로 경쟁하며 위로 기어오르면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몹시 궁금했지만, 어느 누구도 왜 그들이 이렇게 열심히 위로 올라가는지, 그리고 구름 속에 가려진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애벌레들이 기를 쓰고 오르려는 것을 보면 그 꼭대기에 뭔가 좋은 것이 있음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몹시 흥분한 줄무늬 애벌레는 이 경쟁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애벌레들과 엉키고, 밀치고, 밟고, 밟히는 가운데 조금씩 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구름속에 가려진 꼭대기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위에는 그가 기대했던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힘겨운 몸싸움과 끝내 떨어지는 애벌레들의 처절한 비명소리 뿐이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꼭대기에 발견한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올라왔던 것과 같은 기둥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셀 수도 없이 많은 애벌레 기둥들이 온 땅을 뒤덮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몹시 실망한 줄무늬 애벌레는 다시 많은 고생을 하면서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좌절해 있는 줄무늬 애벌레에게 노랑 나비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원래 노랑 애벌레(Yellow)로, 줄무늬 애벌레의 오랜 친구였습니다. 친구의 인도로 줄무늬 애벌레도 나비가 되는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죽음”처럼 무섭고, 어둡고,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나무에 올라가 가지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몸을 천으로 감쌌습니다. 주위는 점점 더 어두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줄무늬 애벌레는 자신을 고치 속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그곳에서 기다렸습니다. 또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그는 날개를 단 나비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는 꽃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천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헬라인들의 방문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로 생각됩니다. 유월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본문에는 이들이 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는지, 그리고 이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만나기를 청한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십니다. 이 헬라인들의 방문과 예수님의 말씀과는 별로 큰 관련성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명성이 이제 이방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에서 이번 유월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인 요한복음 12:12-19절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소리쳤습니다. 18절에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이렇게 환영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여기서 “이 표적”이라 함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을 말합니다. 이 기적으로 인해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훼방하던 바리새인들조차 자신들이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자조하며 자포자기할 지경이었습니다 (19). 고린도전서 1:22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합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이미 “모세와 엘리야”를 능가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최고의 선지자였습니다. 아마도 이런 예수님의 명성을 들은 헬라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지혜의 말씀을 듣고자 주님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앞에 설명한 바 줄무늬 애벌레의 인생 여정에서 보자면,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구름을 뚫고 올라가 애벌레 기둥의 정상에 다다른 “최고의 승리자”였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심지어 세계의 왕으로서 왕관을 쓰는 “즉위식”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십니다. 아마도 이 말을 들은 제자들과 사람들은 속으로 “오 예!”를 외치면서 극도의 흥분으로 침을 꼴깍 삼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죽음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흙 속에 묻히는 것입니다. 밀이 땅에 떨어져 흙 속에 묻히는 것은 우리 보기에 “죽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홀로 깊은 어둠 속에 갇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땅 속에 묻힌 씨에 적당한 온도와 수분이 공급되면 배젖의 딱딱한 녹말이 부드럽고 달콤한 우유 빛 액체(글루코스)로 변하여 배아가 발아할 수 있도록 영양을 공급합니다. 밀알의 배아는 아주 작지만 놀랍게도 이 안에 줄기와 뿌리의 원형이 이미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영양을 공급받은 배아는 기지개를 켜며 그 줄기와 뿌리를 힘껏 뻗어 새로운 생명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줄무늬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무에 매달려 고치가 되는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렇게 어둠 속에서 기다릴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나비의 형질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납니다. 겨드랑이에서 아름다운 날개가 돋아납니다. 한 알의 밀이 열매를 맺기 위해, 줄무늬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 만민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 왜 이 죽음의 과정이 필요할까요? 저는 이 죽음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가 가진 모든 욕심들과 그 욕심들을 이루기 위해 내가 붙들고 있는 모든 수단들을 다 포기하고, 나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바 “생명의 냄새를 풍기는 향기로운 죽음”입니다. 밀이 땅 속에 묻혀 죽을 때, 그 안에 있던 딱딱한 녹말 알갱이는 부드럽고 달콤한 젖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할 때 고집스럽고 딱딱했던 마음이 부드럽고 향기롭고 달콤하게 변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숨겨진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나며 자라나게 됩니다. 죽음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며, 하나님께 순복함입니다. 죽음은 나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죽음은 자신을 완전히 무장해제하며,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이 벌거벗은 채로 잠잠히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통해 맺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이 열매는 “의(righteousness)의 열매”입니다. 농부가 씨를 심을 때, 그 농부는 그 씨 속에 어떤 열매가 숨겨져 있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거둘 것을 기대합니다. 이 열매가 바로 씨앗의 “의(righteousness)”입니다. 줄무늬 애벌레 속에는 “아름다운 줄무늬 날개를 가진 나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나비가 바로 줄무늬 애벌레의 “의(righteousness)”입니다. 애벌레는 평생 한 마리의 애벌레로 기어다니면서 잎사귀를 갉아먹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를 만드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아닙니다. 그는 반드시 자신의 몸을 고치 속에 가두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변형시키도록 맡기는 “죽음”의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그가 태어나고 존재하는 목적이며, 이것이 그가 일생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의(righteousness)”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로마서 3:21).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가 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순종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과 마귀의 세력을 온전히 멸하시는 것입니다. 또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심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며 또 그들로 영생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뜻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그러자 “씨”로 이 땅에 심겨진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활짝 피었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인들의 구주이시며, 세상의 왕이 되심이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의”가 되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한 의의 씨가 되시며 우리로 하여금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빌립보서 1: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배아”로 품은 씨앗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매일 기둥의 꼭대기를 향해 온 힘을 쏟는 애벌레와 같습니다. 이런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섬기는 자”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습니다. 이들의 눈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가지에 달려 창백하게 말라가는 고치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또한 예수님 옆에 나란히 매달려 같은 모습으로 죽어가는 또 다른 고치입니다. 이들은 고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는 세상 일을 잊은 채 “의의 열매”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씨로만 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따르고, 함께 하며, 그 뜻을 섬겨야 합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을 향하여 부드럽고 달콤한 젖처럼 우리의 마음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안에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참으로 생명입니다. 오직 주님만 죽음으로 의와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아시며, 오직 주님만 이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을 따라 죽음으로 의와 생명에 이르는 길을 걷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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