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 당하시고 신문 받으신 예수님
– 진리와 진실과 진실함에 대하여 -
마가복음 14:43-72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 체포 당하시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 공회 앞에서 신문 받으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밤에 “은밀하게” 일어났습니다. 마치 정글에 어둠이 내리면 사나운 포식자들이 깨어나 사냥을 하듯이 그렇게 악한 사람들은 그들의 본색을 가렸던 가면을 벗고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와서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마치 빛은 꺼지고 이제 어둠이 득세하고 군림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곧 일어날 것으로 예언하신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유다가 자신을 팔 것과 (마가복음 14:18-21), 제자들이 모두 흩어질 것과 (14:27),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과 (14:30), 또 예수님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다시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시고 살아나실 것을 (10:33-34)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에 은밀하게 일어난 일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알고 계셨으며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셨던 말씀이 모두 사실임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이 오히려 “진실”이 가장 밝히 드러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둠의 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보시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진리와 진실과 진실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진리(眞理)”와 “진실(眞實)”은 모두 영어로는 “truth”라고 번역되지만 그 뜻은 서로 다릅니다. 진리는 “참된 이치 또는 도리”를 말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본적인 기준이며 시간이나 상황에 상관 없이 항상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혹은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반면 진실은 “거짓이나 왜곡이 없는 사실”을 말합니다. 진실이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면, 진리는 그보다 주관적이어서 종교나 철학에서와 같이 개개인의 믿음이나 가치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리는 늘 “절대적 가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지갑 속의 돈을 보여주면서 “얘는 평생 나를 속인 적이 없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돈이 진리다”라는 것입니다. 돈만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건강이나 쾌락과 같이 늘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작은 진리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진리는 “하나님”입니다. 마태복음 7:2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자면 “한 사람에게 두 개의 진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거나 또는 오직 재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리가 되심은 그 분이 우리 각자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시며, 모든 시간과 상황 속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우리를 지극히 좋은 것들로 축복하시고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하나님만 “나의 진리”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이신 것처럼, 예수님은 “진리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빛이 되신 것은 예수님의 인격 전부가, 주님의 지정의(知情意)가 모두 정확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빛이 전혀 왜곡되거나 어두워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우리 가운데 비추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을 드러내십니다. 이 진실은 “하나님에 관한 진실”이며 또 “나에 관한 진실”입니다. 예수님의 빛 가운데 드러나는 진실은 “내가 약하고 악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도 사랑하셔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진리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 속에 두려움과 세상 욕심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를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시자 베드로는 힘있게 이를 부인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는 체포 당하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으며, 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감추어진 속내가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아마 베드로 자신도 자신에 대한 이런 진실을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 속을 하나님 앞에 드러냅니다. 히브리서 4:12-1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옷을 벗기시고 그의 “적나라한 진실 (naked truth)”을 그대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 말씀에 실제로 자신의 몸을 두른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황급히 도망간 한 청년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51-52).
오늘 본문의 72절에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생각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에 관한 진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순간 그는 예수님의 깊은 용서의 사랑을 깨닫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충성심이 누구보다도 강하며 순수하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장담하는 그만큼 그는 “진실함”으로부터 거리가 멀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실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그의 마음이 “진리 되신 하나님”을 좇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들”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으로 볼 때 그는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상황이 바뀌면 예수님을 저주할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베드로는 이런 자신의 본 모습을 보면서, 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울었습니다. 이제 그는 “진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진실하지 않은 죄인임”을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택하시고 부르셨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절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 그가 “어두운 데”서 고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어두운 데 있는 것조차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기이한 빛”을 비추셨습니다. 이 빛은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비추는 진리의 빛입니다. 이 빛 안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이 빛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죄인 된 자신의 진실을 보고, 또 진리 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그리고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진실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심으로 인해 제자들의 “진실”이 드러난 것과는 반대로, 예수님을 체포하고 신문한 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자신들을 감추고, 오히려 진리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싫어하고 핍박했을까요? 이는 이들이 “거짓 진리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19절에, 유월절 명절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며 한탄했습니다.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이 말은 이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진리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성공의 정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 주위에 몰려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숫자는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의미했습니다. 자신들의 수입, 명예, 권력, 영향력 등이 모두 이 숫자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온 세상이 예수님을 좇음으로 이런 자신들의 존재 기반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을 “유일한 진리”로 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예수님을 시기하고 핍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온 세상이 예수님을 좇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몰려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이를 근심하며 세례 요한에게 고하기를 “랍비여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요한을 대답하기를 자신이 이런 예수님으로 인해 “기쁨이 충만하다”고 하며 또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같은 진리를 좇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모이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두고 예수님과 경쟁하며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두 개의 진리가 그들 안에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했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두려워 이 일을 감행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늘 대낮에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처럼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속내는 더러운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심과 미움, 거짓과 위선, 폭력과 살인심 등으로 그들의 내면은 늘 밤처럼 컴컴했습니다. 그들은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이 되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들은 정글의 포식자처럼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이 진리이고 “사람들”이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어둠이 내리고 사람들이 잠들 때 그들은 가면을 벗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진리 되신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빛 되신 예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유일한 걸림돌인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소망이셨던 예수님을 단단히 결박하여 체포했습니다. 예수님을 신문하기 위해 온 공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거짓 증거”를 찾았습니다. 본래 재판정은 “진실”을 가리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진실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칠 증거를 찾는 것이었으며, 증거가 없다면 거짓 증거라도 만들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만한 증거를 얻는데 실패하자 대제사장이 나서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잡을 증거를 찾지 못하자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을 끌고 나와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이들은 마치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너무 사랑하여 불법을 참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이들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성전을 가지고 자신들의 더럽고 악한 내면을 덮고 숨겼습니다. 또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성전을 이용하여 무죄한 예수님을 정죄하고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성전을 앞세워 거짓 증거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진리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성전이 진실을 가리고 거짓을 꾸미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진리가 아니었으며, 예수님은 진리의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빛이 전혀 비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위선 곧 가짜 의(false righteousness)를 꾸미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두운 밤을 틈타 예수님을 체포하고 거짓 증거로 예수님을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로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이들의 어두운 속내가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내면의 진실이 뿌리까지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진리의 빛” 되신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신 곧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며,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모세의 율법을 집행하는 자들이며, 또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집인 예루살렘의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존재 자체가 거룩함과 의로움의 화신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진리의 빛은 이들이 입고 있는 여러 겹의 위선의 겉옷들을 다 뚫고 들어가 심장을 관통합니다. 그들의 깊은 속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냅니다. 거짓 증거로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리며 득의양양한 그들의 모습이 바로 진리의 빛 되신 예수님 앞에 드러난 그들의 진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이 재판정에서 죄에 대한 판단을 받는 이들은 바로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있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진리의 빛으로 그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판단하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재판장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모든 세상의 권력자들이 위선의 겉옷을 벗고 “벌거벗은 진실 (naked truth)”을 드러낸 채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고 묻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감추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공회 앞에 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우리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시고 회개하도록 도우시는 주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차 예수님의 “벌거벗은 진실(naked truth)”이 드러날 때가 옵니다. 그 때는 주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이 땅에 임하십니다. 마태복음 16:27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진리의 빛을 비추심으로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빛 안에서 자신의 진실을 발견하고, 돌이켜 오직 하나님을 진리로 붙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예수님을 따라 진실한 삶을 살아갈 때 영광 가운데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반대로, 여전히 예수님의 진리의 빛을 거부하고 내면의 진실을 숨긴 채, 욕심을 따라 세상의 우상들을 좇아가는 거짓된 삶을 고집하면 오히려 우리의 모든 죄악이 심판장 되신 예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나고 그 모든 일들에 대해 합당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지금 바로 예수님의 진리의 빛 안에 서게 하시고 진실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우리 각자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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