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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지는 길 (마가복음 7:24-3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6. 20. 01:20

높아지는

 

마가복음 7:24-30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를 받으시고, 그녀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기초로 높아지는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 우리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본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마음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자존심 (pride)” 자존감 (self-esteem)” 있습니다.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흥미롭게도 서로 반대되는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대개 자존감이 낮고, 반대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출 안다는 것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자존심은 남에게 굽힘이 없이 자기 스스로 높은 품위를 지키는 마음이며, 이런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비로소 자신의 높음에 만족함을 느낍니다. 자존감은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 말하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인정, 칭찬에는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롯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신뢰합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점들을 열거한 글을 보았는데,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존심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지만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자존심은 방어적이고 논쟁적이지만 자존감은 남의 말을 듣는 편이다;
    자존심은 쉽게 기분 나빠 하고 억울해 하지만 자존감은 상대를 용서한다;
    자존심은 비판을 잘하지만 자존감은 이해심이 높다;
    자존심은 남의 지적을 용납하지 않지만 자존감은 타인으로부터 배운다;
    자존심은 최고가 되려고 하지만 자존감은 최선을 다한다.

이런 교훈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가운데 얻어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살피는데 도움이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행복한 삶을 위한 진리의 본질을 훨씬 선명하게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참된 높아짐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진리를 배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경으로 가셔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두로는 이스라엘 북부의 페니키아 (보니게) 지방에 있는 지중해 연안의 해안 도시들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으며,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트집을 잡기 위해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7:1). 아마도 주님께서는 이런 와중에 잠시나마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려고 했던 같습니다. 하지만 이방 두로에도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여자가 예수님께로 와서 아래 엎드렸습니다. 여자는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시라면 당연히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여 바로 딸의 귀신들림을 치료해 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자와 그녀의 불쌍한 딸에게 도움을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우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먼저 배불리 먹일 자녀들이라고 칭하시고, 그녀에 대해서는 떡을 먼저 먹을 자격이 없는 라고 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헬라인 여자를 가장 낮은 자리,” 그리고 가장 자리 앉히셨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차가운대답을 듣고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여 화를 내면서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주여 옳소이다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정해주신 낮은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일로 인해 그녀의 자존심 전혀 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예수님과 말씀을 경외하는 그녀의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취급을 당하는 이방 여인인 그녀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과 이렇게 차분하고 담대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갈 있음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자존심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압니다. 이런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녀의 겸손함과 침착함은 경이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사람을 낮추십니다. 신명기 8:2절에서 모세는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십 동안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음이 어떠한지, 명령을 지키는 아니 지키는지를 알려 하심이라.” 같은 장의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너를 낮추시고 너를 시험하사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과연 모세의 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 광야 생활을 통해서 철저히 낮아졌습니다.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 되어 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나아가는 사람들이 것입니다. 결과, “모든 땅의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되었으며 아무도 그들을 당할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11:25). 가장 낮은 자가 되어, 결국 가장 높은 자리에 이르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말씀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정말 무시하셨다면, 그녀와 이런 대화를 나누시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간청을 들으셨을 , 간단히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됐어 이제 가봐!” 하시면서, 그녀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와 함께 하시면서, 긴장된 마음의 대화를 이어가셨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살피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안에 있는지를 들여다보셨습니다. 그녀에게는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한 중요하고 급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앞에 나아온 수로보니게 여자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가장 낮은 자리로 낮추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화를 내거나,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여전히 예수님을 향한 소망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상 이제 예수님과 그녀의 사이를 막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높아지는 길의 시작점 됩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여전히 예수님을 바라고 믿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단단한 철근 콘크리트 바닥 위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인생들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육체의 고통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 하나로 취급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피하시는 대신, 낮아질 곳이 없는 속에 들어가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셔서 이를 감당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하나님을 믿고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낮아진 순간에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음이 밝히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둘이 온전히 하나가 되심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9).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수님을 살리시고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9).

 

여자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자는 예수님께서 정해주신 낮은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아래 부르면서,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 구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날이 다른 곳에서 날보다 나은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문지기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서 날을 보내는 것보다 좋습니다. 여자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겪고 있는 일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으며, 세상에 어느 누구도 일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예수님께 일을 하심은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 불과했습니다. 아주 작고 소소한 은혜였습니다. 전혀 예수님께 불편을 끼칠만한 그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그녀에게 예수님은 크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는 풍요로웠습니다.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의 풍요로움의 비밀을 알고 있음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베푸시는 아주 작은 은혜마저도 그녀가 세상에서 받을 있는 가장 복을 훨씬 능가하는 참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자는 어떤 자일까요? 정말 자는 예수님의 크심 알고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혼자 빛을 발하는 빛과 같습니다. 오직 주만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어둠은 아무리 커도 여전히 어둠일 뿐입니다. 하지만 빛은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같이 작은 빛이라도 능히 우리 영혼을 빛으로 가득 채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빛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예수님께 구하고 있는 은혜는 결코 작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이며, 그녀를 절대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한 축복이었습니다. 이는 그녀가 예수님의 크심과 은혜의 풍요로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참으로 자였습니다.

 

여자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대답을 받아들이시고, 그녀의 간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하였으니라고 하실 , “ 원어 성경에 로고스 (logos)” 되어 있습니다. 단어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특히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되시는 예수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우리 속담에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디 천냥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자는 그녀의 마디로 예수님을 움직이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은 어떤 점에서 특별했을까요? 이는 그녀의 말이 믿음의 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21-28절에도 오늘 본문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여자의 말에 대해 믿음이 크도다 소원대로 되리라하십니다 (15:28).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여러가지로 설명될 있겠지만 오늘 본문을 기초로 믿음을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의 구원하심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이라고 있겠습니다. 히브리서 10:38-39 말씀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물에 빠져 가라앉음, 멸망함)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말씀에서 하나님은 뒤로 물러가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간청에 대해 거절처럼 들리는 차가운대답을 하셨을 , 여자가 화를 내거나 아니면 슬퍼하면서 발길을 돌렸다면, 그녀의 딸은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냉담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물러서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마치 말을 기다리셨다는 듯이, “네가 말을 하였으니하시며 말을 냉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크도다하시며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녀의 말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처럼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마음을 열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말씀(Logos)”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담긴 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과 걸으신 길이 말씀(Logos)” 되십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말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해하고, 마음에 품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말을 하였으니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높아지는 무엇인지를 배울 있습니다. 높아지는 길의 첫째는 모든 근거 없는 교만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 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직 예수님의 크심과 은혜의 풍요로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의 구원하심을 바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높아질 없습니다. 우리가 높아진다는 것은 실상 예수님께서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높아진다는 것은 우리 속에 예수님의 은혜가 차곡차곡 쌓임을 의미합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갔을 딸이 침상에 누워있고 귀신이 그에게서 나간 것을 보았습니다. 건강해진 딸을 순간 그녀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께서 들어오시고 가운데 좌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배우며, 따르며 깊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를 지키며 오직 강처럼 흐르는 예수님의 은혜를 따라 사는 그녀야말로 가장 고상하고 가장 높은 천국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참으로 높아지는 길입니다. 우리가 매일 가장 낮은 자리로 돌아가 크신 예수님을 만날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자랑을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인생을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날까지 매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믿음의 기도로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