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여호와
출애굽기 6:1-13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 영향은 좋은 것이기도 하며 나쁜 것이기도 하며, 이런 것들이 모여져서 때로는 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기도 하기도 하며, 내면의 성격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가까운 친구들이나 선생님일 수 있고,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예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나를 낳고 기른 부모님의 영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참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란 그냥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믿는 하나님”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신(god)”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습니다. “누가 나의 하나님인가 (Who is my god)? 그리고 “이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How is the god)?”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내 인생 전체의 길과 모양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내게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없어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에게 “신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불행을 피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영향을 미치는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돈”이 신적인 영향력을 갖습니다. 유튜버들(YouTubers)한테는 시청자들의 조회수와 구독자수가 그런 힘을 갖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누구이든, 혹은 무엇이든 이렇게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생존과 행복을 결정하는 “신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적인 존재와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속에 자신을 맞추어 가면서 생존하고 또 삶을 영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주인과 노예” 이것이 바로 애굽 왕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과 맺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입니다. 바로는 이들에게 벽돌 만드는 일을 시켰습니다. 아마도 많은 다른 힘든 일들도 시켰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앞부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학대를 당하며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음을 여러 번 언급합니다. 바로는 큰 권세를 가졌습니다. 아무도 이 바로의 권세에 맞서서 저항할 수 없습니다. 바로의 명이면 그것이 아무리 부당하고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그것을 해야 하며, 그 명을 어길 경우 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바로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이끌어내시고자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가서 이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이 말을 들은 바로는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5:1-2).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더 혹독하게 부렸습니다. 모세와 아론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의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바로의 눈”과 “그 신하들의 눈”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 모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바로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바로만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신을 따른다는 것은 그들에게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어떤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을 때, 그 신적 존재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이제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의 되시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의 7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를 폭압적인 우상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시고 그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이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친밀하심은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창세기 18:17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계획을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비밀한 일들을 함께 나누시는 “친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전능의 하나님 (El Shaddai)”은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이 이름은 하나님의 능력(power)과 충분하심(sufficiency)에 초점을 맞춘 타이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은 바로 이 “전능의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권세자 바로의 압제 아래 고역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바로와 애굽인들을 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풍요로운 애굽 땅을 주신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종 모세에게 관을 씌워 그들의 왕으로 모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전능의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로 알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인 6:1-13절에서만 해도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2, 6, 7, 8).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이름 대신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시고자 했을까요?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드러내신 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라는 뜻을 가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고유명(proper noun)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지혜나 능력이나 어떤 다른 성품들 또는 기능들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 이름은 그냥 하나님이라는 “사람(person)”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으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시고 알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는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 이름으로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로부터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름으로 안다 (Know by name)”는 말은 “이름만 알고 깊이 알지는 못한다”는 뜻도 있지만, 반대로 “이름을 알고 부르는 친근한 사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0: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하십니다. 이것은 목자가 그의 양들을 하나 하나 인격적으로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을 한 무리나 재산으로 취급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미국의 소설가 Mark Twain은 “이름은 모든 언어에서 가장 달콤하고 중요한 소리다 (The name is the sweetest and most important sound in any language)”라고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저 자신도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면 참으로 감동을 받으며, 갑자기 그 사람과 가까워짐을 느낍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시고 불려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통해 우리 각자와 인격적인 “사람 대 사람(Person-to-person)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복음송으로 “He Knows My Name (내 이름 아시죠)”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노래의 원 영어 가사는 아래 표의 왼쪽과 같습니다. 저는 이 가사를 오른쪽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바꿔서 부르고 싶습니다. “He Knows My Name” 대신 “I Know His Name”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빨간 글씨로 표시된 가사들이 바뀐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He”를 “I”로, 그리고 “I”를 “He”로 바꾼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비디오를 검색해서 바뀐 가사로 불러보시면 좋겠습니다.)
He Knows My Name | I Know His Name |
I have a Maker He formed my heart Before even time began My life was in His hands He knows my name He knows my every thought He sees each tear that falls And He hears me when I call I have a Father He calls me His own He'll never leave me No matter where I go He knows my name He knows my every thought He sees each tear that falls And He hears me when I call |
I have a Maker He formed my heart Before even time began My life was in His hands I know His name I know His every thought I see each tear that falls And I hear Him when He calls I have a Father He calls me His own I'll never leave Him No matter where He goes I know His name I know His every thought I see each tear that falls And I hear Him when He calls |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고 또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우리가 부를 때 응답하시고, 우리가 어디를 가든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시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뒤에 서 계시며, 우리가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기를 기다리십니다. 나 또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잡으며, 그의 생각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의 마음의 고통을 함께 하며, 그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그가 가시는 길을 함께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알기를 원하며, 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많이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시험했으며, 하나님 또한 이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한 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랑을 시험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곳에 장막을 쳤는데 그 곳에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모세에게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이들은 불평하면서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거 맞아?” 이들의 불평에 대해 모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이들은 오직 “주인-노예의 관계”만 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불평함으로 하나님을 노하시게 했으며, 때로는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며 침묵했습니다. 다른 한편, 하나님께도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신명기 13:3b절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맺기를 원하시는 관계는 “주인-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며 우리가 고난 중에도 여전히 “전능자”가 아니라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살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 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 19:27). 그는 마치 고용된 일꾼처럼 예수님으로부터 “Give and Take” 식의 거래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 16, 17).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둘 사이에 있는 어떤 장벽이나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수천 년의 시간도,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도, 하나님의 아들과 갈릴리 어부 사이의 차이도 초월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내가 세상에서 사람들과 맺는 다른 모든 관계들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면, 나는 누군가의 비참한 노예이거나 자비심 없는 주인이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나의 하나님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면 다른 사람들 또한 그들의 빈부귀천을 상관하지 않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인 여호와로 알게 하신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신적인 영광을 벗어버리고 이 땅에 겸손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오직 “전능한” 하나님만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실 것이나 하실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자신”을 주시며, 그 살과 피를 주시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시는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갖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여호와 그 이름을 부르게 하시며 그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축복하사 우리가 이 이름 안에서 참된 기쁨을 찾으며, 또 이 이름을 우리의 영원한 보배로 간직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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