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4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8복 중 두 번째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십니다. “애통해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슬퍼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가 이제까지 살면서 기억에 남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던 순간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하나는 어떤 젊은이가 한 순간의 실수로 죄를 지어 재판을 받는 법정에서였습니다. 외아들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여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젊은이에게는 생각보다 중한 형이 선고되었고, 가족들과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안으로 끌려들어갔습니다. 저는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헤어질 때까지 무거운 침묵 속에 겨우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을 뿐이었습니다. 또 다른 기억은 어린 아이의 죽음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저녁 시간에 생긴 불의의 사고로 아직 돌이 채 되지 않은 아기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 부모들이 가깝게 알고지내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번에도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 두 일은 오래 전에 겪었던 것이지만 여전히 제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자주 생각이 나곤 합니다. 그만큼 가슴 아픈 일이었으니까요. 아마도 당사자들인 그 부모들과 식구들에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의 본질은 “죄와 죽음”입니다. 그리고 “죄와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슬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애통하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위로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성경 속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 여자를 “돌로 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가졌습니다. 여자는 이 율법에서 가장 위중하게 다루는 간음죄를 지었으며 그것도 현장에서 붙잡혀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제 여자는 꼼짝 없이 그녀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말씀으로 이 불쌍한 여자를 구원하셨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무리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두 자리를 떴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사람들의 정죄로부터,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그리고 그녀 스스로의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짧은 순간 지옥과 천국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7장에는 독자 아들을 죽음에 잃은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울면서 죽은 아들을 메고 가는 장례 행렬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과부를 보신 예수님은 그녀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 또 잠들어 있는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아들을 과부에게 주시며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이 “뉴스에 나올 만한 특별한 사람들이 겪는 불운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위에 예시했던 경우들과 똑같은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실상은 이보다 훨씬 더 위중합니다. 요한계시록 1:7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마태복음 24:30절에서도 예수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 말씀들에서 “모든 족속들이 애곡하리라”고 합니다. 왜 이들이 애곡할까요? 이는 주님께서 능력과 영광으로 오시는 마지막 날이 곧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이 심판장 앞에 서서 자신의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12-13). 그리고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끌려온 여자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그런 기회조차 없습니다. 각자가 지은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그에 합당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들은 애통해 하지만 위로 받을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슬퍼하며 애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7). 이 말씀을 다시 말하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곧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죄사함과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애통함이란 “나의 죄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먼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고, 그 심각함을 깨닫고, 이로 인해 애통하도록 만드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면하신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다가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들의 죄는 결코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심각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야 할 만큼 위중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이 당하시는 십자가 고난이 사람들의 죄 때문임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9, 마태복음 26:28, 누가복음 23:34).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바로 사람들의 죄의 깊이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내 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죄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죄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이를 애통하며, 돌이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의 죄는 “하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영적으로 깨우며, 죄에 대해 예민하고 아파하게 만듭니다. 이는 참으로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애통함”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갑니다. 시편1:1절은 사람들의 죄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우리가 악한 꾀를 마음에 용납하게 되면, 죄인의 길에 들어서게 되며, 결국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삶이 된다고 합니다. “오만한 자”란 부끄러움을 잊은 채 아예 죄를 자랑하며, 더 나아가 의로운 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도 이렇게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의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마태복음 27:39-43). 한 목사님이 오늘날의 세태에 대해 “죄를 죄라고 부르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정말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애통함”은 커녕, 그 애통해 함을 죄로 여기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1:32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렇게 애써 죄를 무시하고 잊음으로써 사람들은 나름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이 없이 죄의 욕심을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평안도 자유도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머리에 숯불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12:20). 로마서 2:5절 말씀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의로운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지은 죄를 애통해 하는 삶”입니다. 이 말은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애통함이야말로 진정한 의로움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18:9). 두 사람 곧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면서 자신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세리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그가 기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세리)이 저(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된 의로움”이 어디서 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참된 의로움은 “나의 의로운 행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애통해 하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디도서 3:5절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그렇습니다. “오직 그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씻음을 받고, 새롭게 하심을 받으며, 위로 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긍휼하심은 위의 세리처럼 자신의 죄를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다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긍휼이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는 때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위에 인용한 바,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자를 정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자,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현장을 빠져나가는데,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9).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바로 보고 이를 인정하며 겸손해짐에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연로한 목사님이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면서 겸연쩍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라!” 우리의 애통함은 날이 갈수록 깊어집니다. 애통함은 우리가 평생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오늘날 세상은 “진지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죄 문제는 제쳐놓고 오직 즐거움을 추구하며, 이익을 추구하며, 성공을 추구하며, 사람들끼리의 인정과 인기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돔 같은 세상을 빠져나와서, 홀로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애통한 마음으로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보석과 같이 귀하디 귀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며 (로마서 8:26), 피조물도 함께 탄식하고 고통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8:22). 우리의 죄로 인해 위로 하나님으로부터 아래로 피조물까지 모두 탄식하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씨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회복은 “애통함의 회복”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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