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유월절
출애굽기 12:1-15
“필요하지 않다구요? 내 생각에 당신은 이 단어의 뜻을 오해하고 있어요. 나는 역사와 문학을 가르칩니다. 언제부터 이것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나요? ‘필요하지 않다’게 무슨 뜻이죠?” (“It’s not essential? I think you mis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word. I teach history and literature. Since when it’s not essential? What do you mean ‘Not essential’?”) 이 대사는 유명한 홀로코스트 (Holocaust) 영화인 Schindler’s List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Schindler는 나치 독일이 자행하는 학살로부터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당시 독일은 유대인들을 게토(Ghetto)라는 유대인 격리 구역에 수용해 놓았다가, 이곳에서 집단수용소(Concentration Camp)로 호송했습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면 거의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Schindler는 “필수 인력(essential worker)”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빼냈습니다. 독일군에 군수품을 공급하는 공장을 세우고 이곳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고용하여 그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군은 게토의 유대인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내기 전에 필수 인력을 선별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필수 인력으로 인정된 자에게는 Blauschein(“blue card”)이라는 카드를 발급해주고 해당 지역에 남아있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위에 있는 대사는 그 필수 인력 선별 과정에 Chaim Nowak(극중 이름)이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그의 본래 직업은 역사와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Schindler의 공장이 필요로 하는 “필수 인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Nowak은 이런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며 항의하고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Schindler의 유대인 조력자들은 Nowak을 위해 그가 금속기술자(metal polisher)라는 가짜 증명서를 만들고, Nowak으로 하여금 그 증명서를 가지고 다시 심사를 받도록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문학 선생”이 아닌 “금속기술자”로서 필수인력으로 인정되어 Blauschein을 받게 됩니다. (유튜브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HlMyQavd5ak)
이 Nowak의 이야기는 우리가 유월절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 곧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을 죽이신 전무후무한 재앙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1:5). 동시에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의 노예 생활을 끝내고 애굽을 떠나게 되는 해방의 날이기도 했습니다.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갈리는 혼돈의 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죽음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흠 없고 일 년 된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7). 그러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그 집에 들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23).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지시를 이행함으로 죽음을 면했습니다. 반면 애굽 사람들에게는 사망치 않은 집이 하나도 없을 만큼 온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치심을 받았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집 문의 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심판을 피하고 생명을 보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혹시 생각하기를 양의 피를 문에 바르는 대신 대문을 튼튼한 “철문”으로 바꾸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도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회당에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피를 바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알아보시고 넘어가실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의 피 대신 빨간 물감을 사용해볼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못된 생각을 한 사람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집 문의 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 이 집이 하나님의 백성의 집임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Nowak은 역사/문학 선생으로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습니다. 그에게는 역사/문학 선생이 필수 인력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다퉈야 하는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역사/문학 선생임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Schindler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역사/문학 선생이 아니라 금속기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수 인력”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존심을 버리고 그의 이마와 양 손에 자신이 “금속기술자”라는 꼬리표를 부착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생명의 표”였습니다. 물론 Nowak이 갖고 있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진심(genuine)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를 속이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Schindler의 친구들은 Nowak을 위해 가짜 증명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가짜 증명서는 “진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Nowak이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야 하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악한 거짓말도 그것이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금속기술자”로 보일수만 있다면 어떤 거짓말도 “진실”이라고 용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 밤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 어린 양의 피를 집 문의 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신 것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 밤에 하나님께서 두루 다니실 때 하나님은 오직 각 집의 문 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지만을 보실 것입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의인인지 죄인인지, 평소에 착하게 살았는지 악하게 살았는지를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의심하며, 어떤 사람은 불평하며 피를 발랐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12:38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중다한 잡족”이 함께 애굽을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그들의 집 문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을 면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름으로써 마치 이스라엘 자손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오직 문 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어린 양의 피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문의 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어린 양의 피만 보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그 피가 곧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그들의 내면이 죄악과 거짓으로 가득해서 구원받을 가치가 없더라도, 어린 양의 피는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증거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그들의 생명이 보전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생명을 구하는 길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또 하나의 명령은 “무교병을 먹으며 누룩을 제하라”는 것입니다. 12:1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하나님께서 왜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는지에 대해, 12:3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급히 애굽을 떠나게 되어 반죽에 누룩을 넣어 발교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누룩은 “죄”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좀더 구체적으로 누룩이 “나쁜 영향력”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누룩을 금하신 이유들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5:6-7절 말씀입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하며, 또 말하기를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자랑하는 것”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누룩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경쟁적으로 “헛된 자랑”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3:21절에는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 하고, 또 4:7절에는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음행을 행하고 이를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1-2).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자랑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죄를 덮는 것이라면, 무교병은 자랑을 덮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 인용한 Schindler’s List의 Nowak에게 역사/문학 선생으로서의 그의 직업은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는 생과 사를 가르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이 “자랑”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수인력”으로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필수인력들은 고상하거나 자랑할 만한 직업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랑할 것이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었습니다. Nowak은 자랑스러운 역사/문학 선생의 직업을 포기하고, 자랑할 것이 없는 금속기술자의 새로운 직업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다른 공장 노동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모두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길을 걷는 “여호와의 군대”가 됩니다 (41,51). 이제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높은 자도 낮은 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모두 급히 만든, 그래서 맛도 없고 딱딱한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거기엔 차별이 없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누룩으로 발교한 유교병을 먹을 수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도 여행 중에 먹을 맛있는 떡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여러 비싼 재료들이 충분히 들어간 부드럽고 맛있는 떡을 풍성히 준비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을 것입니다. 음식 뿐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자랑할 만한 것”을 챙기느라 시간과 마음을 많이 소비했을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나뉘어지고, 귀한 자들과 천한 자들이 나뉘어졌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여러 무리들로 나누어져 다투고, 경쟁하고, 시기했을 것입니다. 늘 “누가 크냐?” 문제로 싸우며 분열했을 것입니다. 무교병은 모든 자랑을 덮고, 온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드는, 그래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 몸과 한 마음으로 움직이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 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시는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십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자랑을 덮으시고 하나가 되게 하시는 무교병, 곧 거룩한 떡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영원한 규례로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매년 이 날들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거듭 명령하셨습니다 (14, 17, 25, 42,47). 몸에 더러운 때가 끼이고 집에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우리는 살면서 매일 “자기 의”를 쌓으며, “자기 자랑”을 쌓아 올립니다. 자기 의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만들며 어린 양의 피를 의지하지 않게 합니다. 또 자기 자랑은 우리로 다투고 경쟁하며 분열하게 만듭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런 묵은 때를 벗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와 화해하고 하나가 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로 한 몸,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3:9절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으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킴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유월절과 무교절은 단순히 연례 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내 머리와 손에 붙어있어서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표식과 같습니다. 우리 또한 나를 드러내는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을 표식으로 삼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의 거룩한 살과 피를 의지함으로, 오직 이것으로 내가 누구임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일 묵은 때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군대로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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