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과 새 계명
출애굽기 20:1-17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입니다. 구약 성경을 통칭하여 “율법과 선지자” (마태복음 7:12) 혹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누가복음 24:44)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여러가지 법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이런 법들 중 “최상위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헌법 (Constitution)”과 같습니다. 한 나라의 헌법은 그 나라에 사는 모든 국민들이 공유하고 지지하고 지켜야 하는 가장 원론적이고 중요한 원칙들과 규칙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충성 맹세(Oath of Allegiance)는 “나는 모든 외부 및 내부의 적들에 대항하여 미합중국의 헌법과 법률을 지지하고 방어할 것이다 (I will support and defend the Constitution and law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gainst all enemies, foreign and domestic)”라고 하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기반으로 그 나라와 그 나라에 사는 모든 국민들이 질서와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서로 협력하는 유기적인 공동체의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헌법과 다른 점은 그것이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34:28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이 말씀에서 십계명을 “언약(covenant)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계명을 가운데 두시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출애굽기 19:5-6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내거신 조건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입니다. 곧 십계명이 이 언약의 중보(mediator)인 것입니다. 헌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그 나라의 시민이 되는 특권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어기는 자는 심지어 시민이라도 “내부의 적(domestic enemy)”로 규정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축복의 길을 열어놓았지만, 동시에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저주의 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십계명을 아주 엄격한 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들은 주로 사람의 행위들(acts)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상을 만들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안식일을 잘 지키면 됩니다. 또 이웃들에 대하여 간음, 살인, 도적질, 거짓 증언 같은 죄들도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범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십계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지 행위들만을 규정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대한 규정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곧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또 17절에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탐심을 경계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행위에 관한 법들까지도 그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어리석다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5:22). 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5:28). 세상의 법들은 지키기가 아주 어렵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행위들에 관한 규정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형제를 죽도록 미워하더라도 그를 건드리지 않는 한 나는 무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마음에 대해 규정합니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최고의 덕목을 요구하며, 우리가 늘상 저지르는 마음의 탐욕, 미움, 정욕을 털끝만큼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언약의 당사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역대상 28:9, 히브리서 4:1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께로부터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법은 행위의 법이기에 앞서 마음의 법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사람들과 맺으신 “첫 언약”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항은 사람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요구사항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 첫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을까요? 로마서 7: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예로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합니다 (로마서 7:7). 갈라디아서 3:22-2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대신 오히려 죄 아래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심으로 그들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죄의 짐을 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은 십계명과 더불어 많은 제사에 관한 규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매일 직면하는 자신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을 포함하여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형식의 제사들을 드렸습니다. 또 이런 제사들을 드리기 위해 “제사장” 직이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늘 팽팽한 긴장을 이루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첫 언약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히브리서 7:18-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엣 계명은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전엣 계명이 연약하고 무익하며,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합니까? 이는 그것이 사람들을 의롭게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은 행위의 법이기에 앞서 마음의 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첫 언약에 주신 성전과 그 안에서 섬기는 예법들은 사람을 “양심상 온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오직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예법입니다 (히브리서 9:9). 따라서 제사장들이 매일 서서 같은 제사를 끊임없이 드리더라도 결코 죄를 없게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0:11). 이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제사장과 새로운 제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서 히브리서 7:26절은 말씀하기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합니다. 또 말씀하기를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합니다 (히브리서 7:24-25). 새 언약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또 영원한 제사장 되신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단번에 (once for all)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9:12). 이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합니다. 히브리서 10:10절은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합니다. 새 언약은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을 소망을 줍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또 요한복음 15:12-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계명의 근거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또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또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랑이 모든 계명들을 다 포괄하며 (로마서 13:9),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8). 우리가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매일 주님의 피로 이루신 의를 힘입
어 살며, 우리를 위해 친히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를 힘입어 살며,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힘입어 살게 됩니다. 비유로 말하면, 이는 마치 천만 마력의 엔진을 앞에 단 기차를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첫 언약에서 우리는 동일하게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계명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무거운 열차를 온 몸으로 끌어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져야 할 짐과 멍에가 무엇입니까? 이는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주님의 새 계명입니다. 하지만 이 계명은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온유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며, 또 겸손하신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이미 완성된 언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일 혹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이미 완성된 언약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말하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사는 것입니다. 새 계명은 우리의 의무나 책임이 아닙니다. 새 계명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우리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사 그리스도 안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시고, 오직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우리의 매일을 “서로 사랑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채워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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