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애굽기 33:12-2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4. 7. 15. 16:37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애굽기 33:12-23

 

그리스 신화에는 이카루스(icarus)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 다이달로스(Daedalus) 발명가요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크레테(crete) 섬의 미노스(Minos) 왕을 위해 미로(Labyrinth) 건축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자신과 아들 이카루스가 미로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섬을 탈출하고자 자신과 아들 이카루스를 위해 새들의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고 벌집에서 얻은 왁스로 날개를 몸에 고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카루스에게 경고했습니다. 너무 낮게 날아서 날개가 바닷물에 젖거나 너무 높게 날아 왁스가 태양빛에 녹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날게 이카루스는 몹시 흥분한 나머지 태양을 향해 더욱 높이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경고대로 날개가 떨어져 바다로 추락하여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다이달로스가 아들 이카루스에게 경고 너무 낮게도 너무 높게도 날지 말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사는 지혜를 준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지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생명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지혜는 많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살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음 통해서 하나님 좇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의 모세는 너무 낮게 날거나 너무 높게 낢으로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출애굽기 32:31-32) 모세는 백성들이 행한 우상 숭배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없는 중대한 죄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백성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범죄한 백성들의 낮은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 가장 앞에 앉아서 하나님의 형벌을 자청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물러서셔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모세의 다른 비행(flying) 나옵니다. 이번에는 너무 높이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간청하기를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합니다 (33:18).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자가 없느니라하십니다 (20). 모세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창세기 32:30절에 보면, 모세의 조상인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에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칭하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전되었음이라 합니다. 모세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물러서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되,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모세를 반석 틈에 숨기시고 손으로 덮어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는 너무 낮게 날거나 너무 높게 낢으로 목숨을 거는 비행을 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찾아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유는 크게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그들을 섬기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16-18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안식일에 예루살렘의 베데스다라는 가에서 어떤 38 병자를 고치신 일을 말합니다. 그는 죄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14절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며, 38년동안이나 누워지내는 병인이며, 심지어 전혀 낫고자 하는 소원조차 없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을 섬기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무릅쓰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19-47절까지 아주 길게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아버지가 되시는지를 설명하십니다. 그중 19-20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그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가장 높이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비교할 , 유대인들은 매우 상반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정죄하고 멸시하고 그들을 멀리했습니다. 다른 ,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었으며,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사람의 계명일 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5:8-9). 이들은 안전한 추구했습니다. 죄인들을 향해 낮아지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을 향해 높아지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라는 안전하고 안락한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평화를 깨뜨리고 안전을 위협하는 이단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오직 자신들의 생명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살펴보면 그에게는 크게 가지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얼굴 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자손에게 주마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하셨습니다 (33:1-3). 하나님의 말씀인즉슨, “내가 약속한 땅은 너희에게 주기는 하겠지만 너희와 함께 가지는 않겠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슬픈 이야기지만 어쨌든 젖과 꿀이 흐르는 얻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모세 또한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의 지도자요 왕으로서 나름 의미 있는 삶을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보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15-16절에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고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의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점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시는 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구하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합니다 (13). 모세가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구하는 것들은 모두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백성들 속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없이는 다른 어떤 축복도 축복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죄악될수록 하나님의 은총을 위한 모세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또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얼굴 구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앞에 반포하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34:5-7절에서 성취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돌판 둘을 다시 준비하여 시내산에 오르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셔서 모세의 앞을 지나시며 이렇게 반포하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하는 모세의 기도에 대해 더하여 말씀하시기를 네가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자가 없음이니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서 주님의 선한 형상들을 지나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얼굴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모세를 보호하시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실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곁에 곳이 있으니 너는 반석 위에 섰으라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등을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21-23).하나님의 등이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등을 보이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확히 없습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또한 몸의 일부이며,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대해 가능한 최대치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카루스 어원적으로 따르는 (follower)”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모세는 이카루스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따르며 영광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불경스럽게 여겨질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셔섰는 스랍들도 날개로 자신들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사야 6:3).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으며 이것은 그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의 소원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에게 최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모세 또한 명의 사람일 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있었을까요? 제가 믿기에 이유들 하나는 모세 자신이 완전히 비워져 있었으며 하나님을 온전히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29-3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증거의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 이카루스는 태양에 가까워지도록 높이 올랐다가 그만 날개를 잃고 바다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태양에 가깝도록 오르자 얼굴이 해처럼 광채가 나게 되었습니다. 이카루스는 사람이 만든 날개를 의지하여 높이 올랐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의지하여 올랐습니다. 모세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물면서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가 소유한 것은 오직 가지, 하나님께서 아신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의 존재 자체가 이름 이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비워져 있었으며,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대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하나님의 길을,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 자신을 원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 서서 가장 높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46). 순교자 스데반은 죽음을 앞두고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55).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그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8).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안을 예수님과 함께 누릴 하늘의 소망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영혼들을 섬기며, 동시에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보이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