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4-6
오늘 말씀은 출애굽기 20:4-6절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에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출애굽기 34:14절에서는 말씀하기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질투”라는 고유명사로 부릅니다. 여기서 “질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Kanna”인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사용되며 성경에 여섯 번 나옵니다 (출애굽기 20:5, 34:14 (2회), 신명기 4:24, 5:9, 6:15). 성경에 “시기”나 “질투”를 의미하는 다른 단어들이 여럿 있지만, 이 Kanna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며 그 의미가 “질투”인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질투는 사람들 사이의 시기 질투와는 다른 의미로 다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명기 4:24절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El Kanna)은 “소멸하는 불 (consuming fire)”로 묘사됩니다. 이 불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위협을 받을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나는 분노입니다. 이 분노로 인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마침내 활활 타오르는 것입니다. 이 둘째 계명은 “사랑”이라는 매우 예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질투하시는 하나님, 소멸하는 불이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매우 엄중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결혼 반지”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서약입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잘 지킬 것인지를 확인하고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우선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 당사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켜야 할 사랑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던 중 딸에게서 전화가 와서 잠깐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제가 짓궂은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왜 네 남편을 사랑하니?” 딸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 사람이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듣고 싶은 대답이었습니다. 만일 딸이 “그가 잘생겨서”라든가 “그가 착해서”라는 이유를 댔다면 제가 조금 실망을 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이유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일진대 이는 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은 모든 조건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순수한 사랑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먼저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로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고기는 오직 물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곧 물고기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지키려면 그것을 물 속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물은 물고기의 생명을 지키는 필수요소(element)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진정한 사랑으로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필수요소는 무엇일까요? 키에르케고로는 말하기를 그것은 “무한함(infinite)”이라고 합니다. 그가 이를 통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가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으나 제 생각에는 키에르케고로가 사랑의 형상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이나 “형상”을 언급하실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이것들이 결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며 사랑 또한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제 딸은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거나,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어떤 모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무한한 사랑(infinite love)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누가복음 10:27a). 이 사랑에서 벗어나는, 혹은 모자라는 사랑은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 되며, 진노의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 또 아무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그들의 눈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지 않고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욕심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입니다. 그들은 그런 욕심과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서 늘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질투”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이 멀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조차 그들의 욕심과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들 중 하나로 보일 뿐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늘 사랑해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착하니까, 그 사람은 잘 생겼으니까, 그 사람은 나한테 잘해주니까 등...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들은 우상에 절하고 그것들을 섬깁니다. 이는 그들이 우상의 노예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탐욕과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들에게 우상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그것이 없이는 큰 고통을 느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마약 중독처럼 참으로 끊어내기 어려운 악한 습관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조심하고 경계해도 재발했습니다. 심지어 애굽을 나온 후에도 늘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출애굽기 16:3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 하며 한탄합니다. 민수기 11:4절에도 이스라엘 중에 탐욕을 품은 무리가 부추기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며 불평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 이들은 하나님이라는 가장 고상한 사랑의 파트너를 갖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이렇게 늘 “자기를 위해” 살면서 욕심과 두려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고상합니다. 그것이 고상한 이유는 사랑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보다도 더 귀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며, 양들을 위한 희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요한복음 18:11).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1)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 예수님께로부터 받기 원하는 “사랑의 형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오직 자신들을 향한 것이기를, 그리고 자신들이 기대하는 형상의 사랑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상한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 한없는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질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7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에 대해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하는 시편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로 자신을 태워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양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 불이 태우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모든 우상들입니다. 이 우상들 가운데는 심지어 “나의 생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심과 같이, 예수님은 “다하는”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이는 사랑이 가장 고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우상숭배는 죄인들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매우 자연스럽게 이 본성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에 속지 않도록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형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냥 “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지침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뜻에 순종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계명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15).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요한복음 13:37). 하지만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 보다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셔서 물으시기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사람들” 속에는 베드로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비록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시며 더 이상 그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셨지만, 그에게는 보이는 형상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입니다. 이후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들을 사랑함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계명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십니다 (요한복음 14:21).
이솝 우화 중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에게 매일 황금 알을 하나씩 낳는 거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으로도 충분히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일 하나씩 황금알을 얻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빨리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저 거위의 배를 가르면 그 안에 수없이 많은 황금알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위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거위의 뱃속에는 황금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매일 얻던 황금알조차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거위는 황금알을 낳았지만 사실 그 거위가 보통의 거위알을 낳는다고 해도 이 이야기의 교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농부는 거위알을 팔거나 부화하여 더 많은 거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황금으로 인해 멀어버렸으며, 하나님께서 천천히 부어주시는 은혜를 참고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이 우화는 오늘날의 세상과 꼭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당장 배를 갈라서 꺼낼 수 있는 황금 송아지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연도 파괴하고, 사람들간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도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릴 만큼의 인내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즐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이시며, 소멸하는 불이 되십니다. 우리가 배를 갈라야 할 대상은 거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질투로,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로 태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간절히 우리와 사랑하기를 원하심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며, 우리 또한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오직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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