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출애굽기 39:32-43, 40:33b-38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일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것이며 (출애굽기 1-18장), 둘째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며 언약을 세우신 것이고 (19-24; 32-34), 셋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도록 하신 것입니다 (25-31; 35-40). 구속은 과거로부터의 회복이며, 언약은 미래를 향한 소망이라면, 성막은 “현재”에 관한 것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tabernacle)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처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마련하신 보좌(throne)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곳에 거하시며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9,40장은 성막의 물품들이 만들어지고, 모아지고, 설치되는 과정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들에서 계속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입니다. 이 문구는 39장에 10번 (1, 5, 7, 21, 26, 29, 31, 32, 42, 43), 그리고 40장에 8번 (16, 19, 21, 23, 25, 27, 29, 32) 반복됩니다. 이는 성막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0:33b는 말씀하기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필하였다 (finished)”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한복음 19:30).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하심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명하신 일들”이 다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성전이 완성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모세가 광야에 세운 성막과 예수님께서 그 희생을 통해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세우신 성전의 의미를 돌아보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모세의 성막은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재료와 구조와 양식에 대해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막이 지어지는 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하는 마스터플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스터플랜에 따라 재료가 준비되고, 물품들이 만들어지고, 모아지고, 설치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막 건축에 필요한 예물들을 가져왔습니다 (출애굽기 36:3). 또 하나님께서 장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모든 필요한 일들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35:31, 36:1-2).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모든 일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냥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성막이 완성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세한 내용을 일일이 열거합니다. 예를 들어, “그가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또 그 궤를 성막에 들여 놓고 장을 드리워서 그 증거궤를 가리우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되니라” (40:20-21) 하며, “그가 또 금 향단을 회막 안 장 앞에 두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되니라” (40:26-27)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와 일꾼들의 순종을 통해서 그대로 이스라엘 가운데 체현(embodiment)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형상을 갖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은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처소이며 하나님의 보좌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가운데 그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성막과 예수님의 성전의 다른 점이라면, 모세의 성막은 “율법”을 집행하기 위한 성전이라면, 예수님의 성전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7).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더 좋은 집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음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 “아무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20:4). 우상은 단순히 금으로 만든 송아지나 나무를 깎아 만든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숨겨진 바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내가 내 마음대로 만든 “신”이기도 합니다. 이 신은 말씀도 없고 음성도 없습니다. 오직 내 말을 들을 귀와 그것을 이루어 줄 손과 발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더욱 교묘하고 악한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음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뜻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들면 안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상으로 우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성막을 세웠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되신 “형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형상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견디시며, 그 “부끄러움”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2).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그 몸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상관없이, 오직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상 모든 보이는 것들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말씀의 지혜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1:18). 우리 또한 사람의 눈에 좋아 보이는 형상을 따라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십자가를 짐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이어주는 “인터페이스(interface)”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고 소통합니다. “인터페이스”란 “두 독립적인 시스템, 주체, 기관 등이 만나서 상호 작용을 하거나 소통하는 장소(the place at which two independent systems, subjects, organizations, etc. meet and act on or communicate with each other)”를 뜻합니다. 한국에는 “판문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곳은 남한과 북한의 대표들이 만나서 회담을 하는 곳으로 두 나라의 경계선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매우 다른 국가입니다. 하나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이며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문점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두 나라가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소통하며, 문제가 있으면 해결합니다. 심지어 이를 통해 남과 북이 한 민족이며 한 나라라는 동질감도 갖게 됩니다. 두 나라의 관계는 판문점에서의 만남이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는가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습니다. 판문점에서 아무런 만남도 회담도 없다는 것은 두 나라의 관계가 최악의 상태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소를 세우도록 하신 것은 이를 통해 그 백성 이스라엘과 소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소”는 모든 것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선포되는 곳이며, 나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는 곳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불편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 높고 사람의 죄는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성막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서로 마음의 뜻이 통하는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모세의 성막에서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오직 일 년에 한 번 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9:7).
예수님은 더 나은 “인터페이스”가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세우는 역사를 다 마쳤을 때 구름이 회막을 덮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으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 9:12). 곧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해 그 피로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이는 우리 몸이 완전히 깨끗해졌으며 따라서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만한 그릇이 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출애굽기 33:18). 하지만 하나님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은 그도 그 영광을 대면하여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나의 죄”였습니다. 그리고 죄인 앞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은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나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4:13).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입니다 (로마서 8:21).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기도이며 소망이 됩니다. 모세의 성막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나의 죄를 씻기 위한 제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마음과 뜻으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으로, 그리고 밤에는 불로 성막 위에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성막 위에 임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하나님의 거할 처소로 받으시고 축복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행하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상징합니다. 40:36-37절 말씀입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 모세의 지도력의 근본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순종에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성막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으로서 모세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실 때도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여러 번 그 부르심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가 되시며 능력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목자가 되신 것 또한 주님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을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지도자로서 실패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위한 목자장이 되셨습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성막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사람은 죄악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거리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멉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를 하늘 높이 들어올리실 길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이 친히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음성을 갖고 계시며, 우리는 순종을 갖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과 지혜를 가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임하시게 됩니다. 이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영을 주셔서 우리 몸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거룩한 성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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