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1-31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일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가 없으며, 또 부활이 없는 십자가 죽음이란 다른 죽음들과 다를 바 없이 의미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4: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가 받게 되는 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이 은혜를 실어나르는 그릇(vehicl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 “지붕 뚫고 하이킥”이라는 시트콤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이순재와 김자옥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이순재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자신이 아직 젊고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김자옥의 친구들이 모이는 부부동반 모임에 자전거를 타고 참석을 합니다. 바이크 슈트와 헬멧을 한 채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그의 멋있는 모습이 김자옥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남자 친구를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만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전거도 없이 바이크 슈트와 헬멧을 하고 있는 이순재는 이제 멋있기는커녕 매우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자옥은 친구들 앞에서 이런 남자 친구를 창피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이 드라마에 나오는 “바이크 슈트와 자전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 주님은 항상 자신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 17:22; 20:18-19; 마가복음 8:31; 9:31; 누가복음 24:7).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는 이 전체의 과정이 예수님께는 “영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23). 그리고 우리는 이 “영광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4; 디모데전서 1:11).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혹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또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마치 자전거도 없이 바이크 슈트와 헬멧(십자가)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또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옷”을 벗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르게 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이며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순재가 바이크 슈트와 헬멧을 한 이유는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 모든 것이 합하여 멋있고 의미 있는 그림이 완성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그 모든 걸음 걸음에 힘을 주고 방향을 잡아주는 우리 삶의 의미요 목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마다 이 사건을 기술한 내용에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한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이 부활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계셨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무덤 문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지고, 예수님의 몸은 그 안에 없었습니다. 또 5-7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몸을 쌌던 세마포와 그 머리를 쌌던 수건이 몸에서 벗겨져서 가지런히 개켜 있었습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일어나 잠옷을 벗어 정리하고 밖으로 나간 듯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으로 부활하셨음은 또 여러가지 다른 일들로도 증거가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또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에 그 손을 넣어 만져보도록 하십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떡을 드시고 (누가복음 24:30) 또 제자들이 가져온 구운 생선을 드셨습니다 (누가복음 24:42-43).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귀신”을 보는 듯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몸의 부활에 대해 밝히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귀신)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37-40). 이 말씀들로 미루어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우리 영혼의 부활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부활까지도 포함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은 “몸의 부활”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요약한 “사도신경”도 그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끝내고 있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 고백에서도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믿음의 내용은 반드시 “몸의 부활”을 포함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중요할까요? 우선, 몸의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믿는 자들을 가리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아직 “몸의 구속 (redemption of the body)”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는 여전히 우리의 육체가 연약하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새 몸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42-44). 이것은 전혀 새로운 몸이라기보다는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는 것”이며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3). 곧 우리의 육체가 없어지고 새로운 육체를 받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죽고 썩을 육체에 영생의 옷이 입혀지는 것입니다.
몸은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10:2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항상” 몸과 영혼으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의 몸과 영혼이 함께 구속을 받거나, 몸과 영혼이 함께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나”라는 존재의 어느 부분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몸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영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며, “몸의 부활”을 강조하는 성경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늘 “몸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늘 육체의 필요와 욕심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직 “몸의 부활”을 믿고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영적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몸의 부활이 “구원의 완성”인 것처럼,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존재의 “연속성(continuity)”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의 보이시고 또 만지게 하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름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바로 그 예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영원히 삼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갖고 있던 소망과 기대도 다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그들 중에 하셨던 모든 일들도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서운 죽음이 예수님께 아무런 해도 끼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죽음은 “잠”을 자는 것과 같았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자주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39; 요한복음 11:11). 그렇게 잠깐 잠을 자듯 죽음을 경험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제자들의 소망과 기대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들과 약속들이 모두 의미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시간은 늘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시간의 끝이 됩니다. 또한 꼭 생명이 끝나는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어떤 “시간의 끝”을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이 유한한 시간 내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IT 대기업인 애플사의 설립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난 33년 동안 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고 하는 그 일을 하기를 원할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 며칠에 걸쳐 계속해서 ‘아니오’일 때, 내가 무엇인가 바꿔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인생의 시간 내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깊은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런 그의 노력에서 그가 항상 바라보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가 그런 일을 찾았을 것인지 의문입니다. 설사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마지막 오늘”까지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시간의 끝 곧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 먹고 마시는 일은 “육체”에 속한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이며, 이에 반해 “하나님의 영광”은 아주 고상하고 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육체의 일이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죽음의 한계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우리가 보는 시선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이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우리의 삶을 한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존재의 “연속성”은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도 다 하나님 앞으로 옮겨 놓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영광을 위해 살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의미 있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19절과 21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십니다. 또 22절에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23절에서는 제자들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주십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말씀들은 그냥 인사말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하늘 나라의 선물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을 주신 것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2: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은혜들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세상의 왕이요, 사람들의 제사장이 됩니다. 우리의 높아짐을 가리켜,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이며, 심지어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2-3). 이 높아짐은 세상이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마치 구름으로 뒤덮인 산에서 그 구름을 뚫고 산의 정상에 올라 그 곳에서 빛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은 항상 밝고 환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어두운 곳에 처하더라도, 성령께서는 늘 우리를 이 높은 곳으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며, 그의 빛과 평안을 누리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고 섬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우리 몸의 부활은 미래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이 소망은 우리 현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활은 우리 크리스천 믿음의 두 기둥 중 하나입니다. 우리 삶의 방식이 이 믿음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이 이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제 생각에 믿음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제 자녀들이 어렸을 때, 저는 그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넓은 운동장에서 제가 자전거 뒤를 붙잡고,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페달에 발을 올립니다. 아이가 페달을 밟는 동안 저는 자전거를 앞으로 밀고, 그렇게 자전거가 달립니다. 자전거가 달리는 동안 제가 자전거를 잡은 손을 살짝 떼어도 자전거는 여전히 앞으로 잘 달립니다. 한동안 자전거를 붙들고 있는 시늉을 하면서 따라가다가, 얼마 후 그냥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뒤를 돌아보고, 자기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있음을 알게 된 아이는 깜짝 놀라서 페달에서 발을 떼고 결국 넘어집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혼자 자전거를 탈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후에 아이는 더 이상 제가 뒤에서 잡아주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자전거는 우리가 페달을 힘차게 밟을 때만 똑바로 서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페달 밟기를 멈추면, 그것은 멈출 뿐 아니라 서있지도 못하고 옆으로 넘어집니다. 더 나빠질 경우, 우리는 자전거를 잃어버리게 되고 또 우리가 입고 있는 바이크 슈트와 헬멧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의심은 우리를 더 큰 의심으로 인도하여, 믿음은 우리를 더 큰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믿음을 갖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믿음에 계속해서 페달을 밝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라도 말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 “오늘” 경험하는 부활이요 생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믿음에서 강하게 하시고, 그 날에 이르기까지 믿기를 결코 멈추지 않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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