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마가복음 8:11-2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7. 25. 05:21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마가복음 8:11-21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경고하십니다. “누룩(yeast 또는 leaven)” 누룩곰팡이를 함유하고 있는 발효제인데, 곰팡이는 당이나 탄수화물을 흡수하여 이산화탄소와 알코올을 배출합니다. 그래서 누룩은 술을 빚거나 빵의 반죽을 부풀릴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누룩 좋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나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천국의 비유들 누룩의 비유가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누룩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3:33). 아주 적은 양의 누룩 안에 가루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폭발력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의 앞부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그리고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들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어린 아이의 식사에 불과한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 안에 오천 명의 장정들을 배부르게 먹일 만큼의 풍요함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세상속에 넣어진 누룩과 같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시골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그런 분이셨습니다 (이사야 53:2). 하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천국의 씨앗이 세상의 수없이 많은 영혼들 속에 뿌려지고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천국의 아이들로 자라게 하십니다. 누룩은 좋은 의미에서 천국의 확장성 의미합니다. 작은 누룩 덩이처럼 천국의 재료는 겉으로 보기에 보잘 없이 겸손하지만, 안에는 세상을 축복하고도 남을 만큼 영광스러운 생명과 능력이 가득합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죄의 영향력 의미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5:6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5:2절에도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 교회 안에 음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를 용납하고 심지어 이를 자랑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것은 그들의 교만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교만해졌다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마음이 높아졌다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로 인해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심지어 이를 자랑하고, 탐하며, 즐기게 됩니다. 이는 마치 에덴 동산의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갔을 , 그녀의 마음이 높아져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만큼 탐스럽게여기며, 그것을 따먹은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3:5-6). 이런 마음은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됩니다. 하와는 나무의 실과를 자신의 남편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적은 누룩이 덩어리에 퍼지게 됩니다.”

 

데가볼리 지방의 갈릴리 해변에서 일곱 개와 물고기 마리로 4000명을 먹이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힐난하며시험하여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기뻐하시지 않았을까요? 사실 표적을 구하는 이들 앞에서 보란듯이 놀라운 기적 행하신다면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을 더욱 기고만장하게 만든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시험하여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증거를 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들이 증거를 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신들의 불신을 합리화시키고, 이를 자랑하고, 뽐내기 위해서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100가지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100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불신앙의 지혜 자랑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미 보이신 진리의 증거들을 조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의심을 풀어주시는 대신,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을 없는 200가지 이유를 추가로 더해주십니다. 그들을 깊은 불신의 늪으로 빠뜨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주님을 그것을 알아주시고 받으십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도 명하여 옮길 있으며 못할 것이 없으리라하십니다 (마태복음 17:20).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겨자씨 만한 믿음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셨음에도 이들의 깊은 불신의 메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은, 어떻게 보면, 그들의 고집스러운 불신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 너희들이 이겼다! 이제 너희가 원하는 길로 계속 가거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무서운형벌이 아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순종하고, 경배드릴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여러가지 질문들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가?”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알고 사랑하듯 나를 그렇게 아시고 사랑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이 목자가 그의 양에게 하듯 그러하신가?” “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되었는가?” “ 앞에 과연 부활과 영생이 있는가?”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은 우리 마음 속에 이런 의심들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피할 없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심은 하나님을 시험함으로써 해결되지 않습니다. 의심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즉시불신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도우시기 위해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시며,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반복되는 죄와 연약함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 나의 무력함과 무능력함, 심지어 나의 믿음 없음 문제까지도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겸손한 믿음입니다. 나의 죄악됨과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구원하심을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그리고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티끌만큼의 의심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평안이 강물처럼 흐르기까지,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항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뒤로 하시고 다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져오기를 잊어버려서 배에는 떡이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일에 대해서 논하면서, 어떻게 다가오는 끼니를 해결할 것인지를 근심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하셨습니다. 걱정을 하고 있던 제자들의 귀에는 예수님의 말씀 오직 만들 쓰는 누룩이라는 단어만 걸렸습니다. 누룩이라는 말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떡을 잊어버린 것을 책망하시나보다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오직 떡이 없음에 대한 걱정 뿐이었습니다. 마음이 심란하고 분주했습니다. 마음의 걱정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도 삼켜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둔한 마음을 책망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내가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때에 조각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제자들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 둘이니이다.” 물으셨습니다. “내가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때에 조각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일곱이니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믿고 떡이 개만 남았어도 이상 걱정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증거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다시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집요하게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이나, 표적을 마음에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같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둔한 마음입니다. 같은 말을 성경에 다른 부분에서는 완악한 마음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3:5). 이들은 매일 보고 듣지만 실상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에는 같은 불신,” 같은 염려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들을 다그치십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깨닫는다 (comprehend: com(together) + prehend(seize))”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마음에 함께 모아 붙들다 (seize together: to set or join together in mind)”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시고 말씀을 베푸시는 이유는 그것들이 조각 조각 우리 속에 모여서 우리 마음에 천국의 지식 형성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생활의 염려에서 벗어나 이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천국의 지식에 마음을 기울이기를,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마음에 붙들고 항상 기억하기를, 그리고 이제 천국의 지식을 따라 믿음으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무엇일까요? 이는 그들이 가진 나쁜 영향력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이며, 헤롯은 정치 지도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지도자이며 권력자라는 점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말에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속담이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의 분열적이고 선동적인 발언들로 인해 미국 내에 증오범죄(hate crime)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통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어떤 점에서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을까요? 그것은 마디로 말해서 거짓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외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1). 바리새인들에게 신앙이란 그들의 속에 감추어진 죄를 가리기 위한 거짓 행위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OO인체 연극을 하는 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외식 거짓된 종교 행위 드러내시고 제자들에게 이를 경계하시는 말씀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면서 구제하는 자들,”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할 슬픈 기색을 하며 얼굴을 흉하게 하는 자들 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구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께서 계셔야 하는 자리에 대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혀 놓고, 사람들 가운데 자랑하고 높임을 받기 위해자기 자기 영광 구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더욱 세속적입니다. 그는 음란하고, 쾌락적이며, 게다가 천박하고 경솔하며 우쭐댔습니다. 물론 그의 아버지인 헤롯 대왕처럼 권력과 재물을 탐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을 옳지 않다고 책망하다가 미움을 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중요한 순간마다 헤롯과 협력했습니다. 마가복음 3:6절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 것인지를 의논했다 합니다. 마가복음 12:13절은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냈다 말씀합니다. 이렇듯 바리새인들과 헤롯은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서 서로 협력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탐하는 것이 헤롯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헤롯을 경멸했지만 속으로는 그가 가진 것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겉모습을 거짓 신앙으로 꾸미고, 속으로는 헤롯과 같이 음란하며 권력과 재물을 탐했습니다. 그리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죄악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가지 서로 다른 누룩이라고 하기보다는 둘이 합쳐서 세속적인 신앙 본질을 구성한다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마태복음 23:33). 사람들은 편으로는 바리새인의 외식을 따르고, 다른 편으로는 헤롯의 탐욕을 따릅니다. 그리고 결국은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안에 무섭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 되고 맙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으로 오염된 회칠한 무덤같은 신앙과 비교되는 정반대의 신앙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6-7 말씀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을 가리켜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질그릇처럼 투박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안에는 보배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 있습니다. 바울은 질그릇 같은 자신을 의지하지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은 더더욱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의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되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심히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질그릇처럼 겸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거짓 신앙입니다. 거짓 신앙은 참으로 유혹적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과 속에 감추어진 탐욕을 동시에 약속합니다. 이것은 편으로는 영광을 구하며 다른 편으로는 여러 욕심에 이끌려 사는 우리의 본성과 너무나 맞습니다. 그래서 전염병이 번지듯이 퍼져 나갑니다. 특히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보일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며, 자기 속에 숨은 욕심을 섬기는 우상 숭배 뿐입니다.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에 오염된 거짓 신앙은 우리를 믿기 이전보다 훨씬 악한 상황으로 떨어뜨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사람들 앞에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질그릇 같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영으로 안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영접하여 모시고, 주님을 높여 예배 드리며, 뜻이 안에 이루어지도록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높임을 받으시며, 주님의 뜻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마귀의 말은 교만한 마음을 파고듭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겸손한 마음 속에 임합니다. 우리가 괴악한 누룩을 버리고, 오직 겸손한 마음, 착한 마음,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생명의 말씀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은 참된 천국의 자녀들로 자라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