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하나님의 언약궤 (사무엘상 4:1-1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8. 8. 04:19

하나님의 언약궤

 

사무엘상 4:1-11

 

성경에 쓰여진 모든 이야기들과 교훈들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 주제가 무엇인지를 하나 말해야 한다면, 저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은 참으로 성실하십니다. 그것은 항상 자비롭고, 선하며, 지혜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광야에 길을 내시며, 모든 거스르는 대적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뻐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순종하여 따른다면 우리는 영광의 증인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의 축복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뻐하지 않고 그의 인도하심을 순종하여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죄가 것이며 우리는 축복 대신 오히려 많은 어려움을 겪게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행과 불행, 그리고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십니다. 신명기 30:15-18절에 하나님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앞에 두었나니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모든 길로 행하며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모든 길로 행하며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합니다.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생명과 복이 됩니다. 사람의 몸에는 우리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는 활력징후들(vital signs) 있습니다. 체온, 호흡, 맥박, 혈압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징후들을 통해서 몸의 이상을 발견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있습니다.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도 이런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위해서 우리들 가운데 어떤 장치를 두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장치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살피고, 거기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장치들의 예로, 에덴 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리고 오늘 우리가 공부할 여호와의 언약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를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기 2:16-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생명 나무와 함께 동산 가운데 있었습니다.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자신이 항상 동산 가운데 좌정하시고,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인도하시기 위해 세우신 생명 장치 것입니다. 하지만, 뱀은 생명 장치 오히려 사람을 유혹하고 죄를 짓게 하는 미끼로 사용했습니다. 뱀이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폐한 것입니다. 뱀은 여자에게 너희가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대신 거짓말 여자의 마음에 심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여자의 눈이 바뀌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만큼 탐스럽게보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하나님의 언약궤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나무로 만든 상자인데, 안에는 증거판(the Testimony) 들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5:16). 증거판은 하나님의 모세가 준비한 개의 판에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십계명을 새기신 것입니다 (신명기 4:13). 모세는 판을 언약의 (the tablets of the covenant)”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명기 9: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지켜야 계명들을 주시면서, 이를 기초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세계가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말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6). 언약궤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임하시며 말씀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33절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민수기 10:3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을 떠나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삼일 길을 앞서 행하며 그들의 곳을 찾았고 ……”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통해 앞서 행하시며 백성들의 곳을 찾으시고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언약궤의 앞서 행함은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나타납니다. 여호수아 3:14 말씀입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언약궤를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요단강에 흐르던 물이 완전히 끊어지고 바닥의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고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요단을 건넌 후에야 여호와의 궤와 그것을 제사장들이 마지막으로 강을 건넜습니다 (여호수아 4:11). 그리고 다시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언약궤를 통해서 이스라엘 앞에 행하심은 사람들의 우두머리 되시기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앞서 행하시며 원수들을 쫓아내시고, 없는 길을 내시고, 안전한 곳을 찾으셔서 그의 백성들을 평안하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겸손하시고 자비하시며, 그의 돌보심은 세밀하시며 실패가 없습니다. 그의 백성들이 지켜야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는 가지가 필요합니다. “너희가 말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약궤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죽은 , 언약궤는 여전히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지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서 잊혀졌습니다. 사무엘상 3: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 말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이끌기 직전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3장의 마지막 절과 41절에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사무엘의 말이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아직 영적으로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4000 가량의 이스라엘 군사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들이 전쟁에서 패한 것에 대해서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 패배가 하나님께로부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대답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떠나 있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신,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들은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 군대의 진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블레셋 군대로부터 구원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도구 수단 불과했습니다. 정말 이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조차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더럽히고 회막 문에서 섬기는 여인들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들을 위해 싸움을 시킬 만큼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언약궤는 그들을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언약궤는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보병들도 3 명이나 엎드러졌습니다. 승리와 구원을 기대했던 언약궤가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그랬을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그들 자신이 머리가 되어서 하나님을 인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위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져다가라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빼앗겼고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함부로 다루는 모습이 그것을 탈취하는 이방인들의 무례함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말은 에덴 동산의 여자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는동작에도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의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고 인도하시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리고 언약궤라는 장치를 주셨는데, 사람은 장치에서 언약의 말씀 없애버리고 오직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장치를 사용하려고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죄와 죽음과 멸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가 내게 속하였다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없이 세계만을 손에 넣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필요하면하나님도 마음대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며, 내가 왕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의 중보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15 말씀입니다. “그는 언약의 중보니 이는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언약궤 속에 모세의 증거판을 통해 맺으신 언약을 언약또는 언약이라고 한다면, “ 언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맺으신 언약입니다. 언약은 무엇일까요? 언약은 언약과 어떻게 다를까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와 맺은 언약을 규정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8:10 말씀입니다. “ 주께서 가라사대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말씀은 예레미야 31:33절을 인용한 것인데, 언약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를 통한 언약에서 하나님의 법을 판에 기록한 것과는 달리, 예수님을 통한 언약에서는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하심과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궁극적인 구원 우리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우리에게 이제 이상 다른 언약도, 다른 구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26-27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짐짓 죄를 범한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며, 우리 마음에 쓰여진 하나님의 법이 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쓰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성령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26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아버지께서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절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의 말씀들에 비추어 보자면, 성령님은 캐리어(carrier)”라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진리,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캐리어가 되십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진리를 갖고 있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방식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 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캐리어가 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님은 안에 하나님의 계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가져다가 자신들을 위해 싸우도록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방식대로 성령님을 이용하려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8:18). 언약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행하며 인도할 , 궤는 흐르는 요단 강물을 멈춰 세우고, 여리고의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전능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그것을 이용하고자 했을 , 언약궤는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음을 읽을 있습니다. 성령님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전능하십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일하시며, 오직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때만 강하십니다. 이외의 경우라면 하나님의 영은 침묵하시고, 심지어 우리를 대적하여 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가 내게 속하였다 하십니다. 여기서 세계 모든 것을 포함하며, 심지어 나의 생명과 번영과 미래까지도 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만 그것에 가까이 가며 그것을 얻을 있습니다. 길에는 우회로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의 귀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욕심에 고정시키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앞서서 달려갈 것이며, 결국 하나님을 잃고 이와 함께 모든 것들을 잃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멈추시면, 우리는 하나님 뒤에서 멈춰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 움직이시면 우리도 일어나 뒤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씀을 살필 있는 놀라운 장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이끄시는 우리 영혼의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셔서 우리 안에 빛을 더욱 밝히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위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일을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더욱 힘써 나아가는 우리 각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