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마가복음 4:1-2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네 종류의 땅에 대해서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에서, 씨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릴 쌔 어떤 씨는 길 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길 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이 텄지만, 흙 속의 돌들 때문에 뿌리를 뻗지 못해서 해가 돋자 햇볕에 말라버렸습니다. 가시떨기 가운데 떨어진 씨는 함께 자라는 가시가 기운을 막아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잘 자라고 결실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비유는 나오는 네 가지 땅은 서로 다른 종류의 밭들을 얘기한다기보다는 씨가 땅에 뿌려져서 열매를 맺기까지 여러 단계를거치며, 각 단계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는: 먼저, 땅에 심겨지고, 다음에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다음에 위로 줄기가 자라고, 마지막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단계에서, 씨가 땅에 심겨질 때 길 가처럼 땅 표면이 딱딱하면 씨가 흙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노출 된 상태로있다가 새가 와서 먹어버립니다. 그리고 흙 속에 심겨졌더라도, 안에 돌들이 많으면 뿌리를 뻗을 수가 없어서 곧 말라버립니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더라도 주위에 잡초들이 함께 자라면 영양분을 빼앗겨 제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오직 각 단계에서 이런 장애물들을 극복한 씨만이 무성하게 자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15-2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네 가지 종류의 땅들이 말씀과 관련하여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를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심겨지고,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이 언급됩니다. 그것들은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사단, 말씀을 끝까지 붙들지 못하게 하는 환난과 핍박, 그리고 말씀의 기운을 막는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입니다.
오늘 성경 공부에서는 이런 각 단계에서의 장애물에 대해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는 세상의 길, 환난과 핍박의 근원이 되는 본토친척 아비집, 그리고 욕심과 두려움의 온상이 되는 자기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말씀의 성장과결실을 방해하는 이런 장애물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길 가란 딱딱한 땅을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하나님의 길을 우리 안에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이미 “세상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길이란 세상의 상식,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지혜 등을 말합니다. 이런 세상의 길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거짓된 길”이며 “악한 길”이며 “헛된 길”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다녔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이 당연한 길이며, 옳은 길이라고 믿고 계속 그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완고한 마음, 믿지 않는 마음, 딱딱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길”을 거부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는이렇게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이 충돌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곧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자, 이 말을 들은 사라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있겠느냐?” 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자가 나중에 부활하면 그 일곱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괴이한 질문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묻기를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겪는 불행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법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은 진화론, 빅뱅 이론 등과 같이 몇몇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이론들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마치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굳어진 거짓된 사상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반면 살아 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영적 세계에 관한 진리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고 사람들의 길과 다르다고 해서 마음을 닫아서는 안됩니다. 사실성경 말씀은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이는 이 말씀들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길, 세상의 상식과 다를지라도 “아멘” 하며 냉큼 그 말씀을 받아 내 마음에 소중히 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가며 우리에게는 말씀의 싹을 틔울 기회조차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키우는데 있어서, 두 번째 장애물은 말씀으로 인해 환난과 핍박입니다. 디모데후서 3:12에,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합니다. 그런데 이 핍박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아니라 대부분 내가 속한 공동체, 즉 가족, 친척, 친구, 학교, 직장, 이웃 등으로부터 옵니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개인들 및 공동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이런 사회적 관계망은생각보다 단단해서 마치 바윗돌과 같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기로마음을 정하면, 사람들은 이를 “배신”으로 여기며, 싫어하고, 핍박합니다.
창세기 12:1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가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까요? 여호수아 24:2-3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강 저편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고자 했다면 다른 신을 섬기는 그의 가족들, 친척들, 그리고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는 배신자라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비슷한 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자, 유대인들이 그부모를 불러 그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모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임을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마을 공동체에서 쫓아내기로 결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42절에도 “관원 중에 저를 (곧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핍박이 두려워서 이를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말씀으로 인해환난과 핍박이 오면 금방 넘어지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매우 단호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고 그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장사하게 허락하소서” 하자 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이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 하자 그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사사로운 일들을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만일 이들이 부친을 장사하기 위해, 그리고 가족들과 작별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면 어떤 일이있을까요? 거기에는 또 다른 사사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이들의 성품으로 미루어볼 때 그것들을 먼저 처리하기위해서 계속 거기 머무를 것입니다. 이들이 가족들의 불평과 원망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세상에서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환난과 핍박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키우는데 있어서, 세 번째 장애물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곧 내 안에 있는 욕심들과 염려들입니다. 사실이것은 가장 치명적이고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입니다. 마치 밭에 잡초가 수시로 자라듯이, 마음 속의 욕심과 염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생깁니다. 심지어 어떤 잡초는 잡초가 아닌 것처럼 위장을 하기도 해서 말씀 대신 이것을 더 소중히 키우기도 합니다. 특히 유혹들이 많고 두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오늘날 방심하면 이런 욕심과 염려가 우후죽순처럼 만연할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오직 말씀에 집중하고, 헌신하기 위해서는 매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고, 새롭게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십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대부분 내가 보다 안전한 삶을 누리며, 더 풍요롭고, 더 높아지기 위해서 곧 나를 위해서 말씀을 붙듭니다. 하지만 그럴경우 결코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직 나를 깨뜨려 끝까지 말씀에 헌신할 때만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앞에 언급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말씀이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게 됩니다. 말씀이 “왕”의 자리에 앉게 되며 나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왕이 되시며, 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되시도록 하는 것이 그의 삶의 의미이고 목표이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도 기쁘게 받아들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참으로 생명의 말씀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비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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