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4:46-53절 말씀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일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믿는다”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4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50절에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시자, 왕의 신하가 그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고 합니다. 또 53절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때에 아이가 낫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왕의 신하와 그의 온 집안 식구들이 믿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들을 기초로 믿음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본문을 공부하기에 앞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믿음을 “터널”이라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터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터널을 통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많은 좋은 것들이 오가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히스기야 터널이라는 터널이 있습니다. 성문 밖에 있는 기혼 샘(Gihon Spring)이라는 샘이 있는데, 이 샘에서 솟아나는 물이 이 터널을 통해 성 안으로 흘러들어 실로암 연못에 모이게 됩니다. 그러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사람들이 성밖으로 나가 기혼 샘에서 물을 길었었습니다.그런데 역대하 말씀에 따르면, 유다 왕 히스기야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오자 유다의 방백들과 용사들이성 밖에 있는 기혼 샘을 덮고 터널을 파서 그 물길을 성 안쪽으로 돌렸습니다. 이로 인해 앗수르 사람들은 샘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반대로 예루살렘 성 사람들은 성이 앗수르 군인들에 의해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 내에서 안전하게 물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터널입니다. 그리고 이 터널을 통해 생명의 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끊임 없이 흘러 들어옵니다. 기혼 샘은 성 밖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 계시지 않고 세상 밖에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과 연결된 은밀한 터널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도 기뻐하고, 두려운 일이 많은데도 평안하고, 미움을 받는데도 사랑하고, 가난한데도 베풀기를 좋아하고, 연약한데도 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믿는 자들의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혹시 무슨 숨겨놓은 재산이있나? 우리가 모르는 든든한 백이 있나? 맞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숨겨놓은 보배가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터널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뚫려 있는 비밀 통로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의 통로를 뚫는 작업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불신과 두려움이라는 바윗돌이 생각보다 매우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간청했습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당시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라는 마을에 계셨으며, 왕의 신하의 집은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이었는데, 이두 마을 사이의 거리는 약 27km로 걸어서 하루가 걸리는 거리라고 합니다. 왕의 신하의 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는 신하의 말을 듣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너는”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단지 이 신하에 대해서 뿐 아니라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앞 부분 곧 2-4장까지의 말씀을 읽어보면“표적”과 관련된 말씀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2:11절에는 “예수께서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합니다. 2:23절에는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합니다. 3:2절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합니다. 또 4:45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때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는데 이는 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들 곧 행하신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고, 환영한 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본 까닭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절에 따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합니다. 왜 유대인들은 이렇게 “표적”에 열광하게 된 것일까요? 신명기 18:15절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가운데 나와 같은 선지자 한 명을 세우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묻기를 “그의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아나요?” 합니다. 이에 모세가 대답하기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한바 “증험이나 성취함”이 곧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표적의 목적은 어떤 선지자가 하는 말이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인지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그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으로 받아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며,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표적을 행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로 그 약속된 선지자로 받아들이고 그의 말씀을 듣고 믿도록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표적에 관한 말씀들을 보면,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말은 전혀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표적 보기만을 즐겨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능력 있는 선지자,” “내 병을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 정도로 믿은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실 때는 모두 숨을 죽이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예수님께 집중을 하다가도,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 금방 흥미를 잃고 딴 짓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예수님께서 언제 또 표적을 행하시나 기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시지 않으면, “이 분도 별 거 없네!” “모세만못하네!” 하며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기다리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큰 능력을가지고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고, 원수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가 어려웠습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으로는 참된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선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을 듣고, 믿으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주로 이 반대로 행합니다. 곧 말씀이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믿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으면 믿음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다시 무엇인가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믿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평생 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며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만큼 온전한 믿음으로 이 말씀을 받고,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믿음을 도우시기 위해 표적을 행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은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병든종을 치료해주시기를 청하면서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십니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고집하고 계속 “증거”를 요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두려운 증거들”로 보여주십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하나님께서 가장 겸손하시고, 온유하시고, 인자하실 때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최고의 믿음을 드리고 최고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믿음을 고집할 때 그 결국은 미혹되고 멸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사단 마귀는 거짓 기사와 표적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단 자신이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래서 보고 믿는 믿음의 결말은 틀림 없이 진리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사단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보고 믿는 믿음은 마치 “마약”과 같습니다. 믿기 위해 더 자극적이고 믿기 어려운 기적들을 찾습니다. 이상한 종교 집단에 현혹되고, 볼거리가 많은 장황한 종교 행사들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시각 효과”가 범람합니다. 눈으로 보기에 그럴듯하면 내용이 전혀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진리의 말씀을 듣고 참된 믿음을 가질 가능성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신하는 다급한 마음으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며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가시지않고 그냥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모시고 가려고 했던 신하의 계획은 실패로끝났습니다. 하지만 신하는 함께 가시지 않는 예수님으로 인해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믿었습니다.”곧 육신의 예수님 대신 영의 말씀을 얻은 것입니다. 아마도 신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또 그의 마음 속에는 이제 곧 숨이 널어갈 듯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들로부터 몇 십리나 떨어진 먼 곳에 계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 한 마디로 죽어가는 아들을 살릴 수 있을까 의심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하는 말씀을붙들었습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 네 아들이 살았다,” “네 아들이 살았다.” 신하는 마치 단단한 바위를 깨듯이 말씀의 곡괭이를 꼭 움켜쥐고 내려치면서 자신의 불신의 바위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하의 첫 반응이 재밌습니다. 아들이 죽을까봐 애태웠던 아버지임을 생각할 때, “아! 내아들이 살았구나! 만세” 하며 기쁨의 탄성을 지르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첫 번째 관심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하가 던진 첫 질문은 “아들이 언제 낫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의관심이 병든 아들로부터 예수님의 말씀으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확인했습니다. 신하는 아들이 살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인해 놀라와 하며 “아멘”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이지만, “이미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설사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이미 이루어진 약속”으로 믿고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약속인 반면, 우리의 믿음은 아직 미완성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완성시켜야 할 것은“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후 실제로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신하는 상당한 시간을 아무 것도 모른 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이 바로 내 믿음을 완성시키는 시간입니다. 혹시 말씀대로 되지않을까 초조해 하며 안절부절 하는 대신, 내 불신의 바위를 깨뜨리고 나를 온전한 믿음 위에 굳게 세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다만 내 믿음이 완전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하는 대신, 내 불신을 회개하고 깨뜨림으로 온전한 믿음을 향해 힘써 나아가야 합니다.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오직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다가 중간에 믿음이 약해져서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라든가 “다른 좋은 의사를 만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기대하신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믿음은 헛된 소망, 자기 확신, 불의한욕심, 심지어 두려움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을 갖되 그것이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인지를 자세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의 말을 통해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때임을 확인했습니다.그리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말일까요? 물론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결론은 “건강해진 아들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라는 축복의 터널이 완성된 것입니다. 히스기야 터널이 기혼샘의 샘물을 성내로 끌어들이듯이, 이 예수님 터널은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온갖 신령한 하늘의 복들이 믿는 자에게 쉼 없이 흘러내리는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가 믿어야 할 “영원한 구원의 말씀” 곧 복음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표적을 행하시기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전 인생은 이 구원의 복음을 드러내시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 복음이 천만 가지 표적들을 합한 것보다 더 귀하고 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완성된 믿음,”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님”을 주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약속을 받고 또 성령님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더 받을 것도 없고, 또잃을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평강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해야 할 일은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시고 또 성령으로 인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에베소서 1:13절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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