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린도전서 2:2절과 1:22-24절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합니다. 또 1:23절에서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냥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 “성스러움”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라는 말이 별로어색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이제 막 예수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지던로마 제국에서 십자가는 단지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사형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방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고 따를 “그리스도” 곧 “구원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설득하기 위해서 이구원자가 얼마나 능력이 많고 지혜로운가를 선전해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합니다. 당연히 유대인들한테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표적들을, 그리고 헬라인들한테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지혜로운 말씀들을 철학적으로 풀어 설명하면 아주 쉽게 전도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말과 “그리스도”라는 말은 전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울도 인정하기를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그리스도, 그런 구원자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님과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알고자 했으며, 그것만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24시간 십자가에 대해서만 얘기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의 중심은 늘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예수님과 주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사도 바울을 가장 진실하고 헌신된 복음의 일꾼으로 인정한다면, 우리가 그의 이 말을 힘써 이해하고 우리 또한 예수님과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가 그리스도 복음의 중심에 있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나 때문에, 그리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나” 곧“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그림은 사람의 관계도(relationship diagram)입니다. 사람은 항상 여러 관계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고 있는 중요한 대상들은 위로 하나님, 수평적으로 나 자신과 이웃, 그리고 아래로 세상이 있습니다. 사람의 어떠함은 곧 이 관계의 어떠함 입니다. 여기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첫 사람 아담입니다. 그는 어떤 존재였으며, 어떤삶을 살았을까요?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는 그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아 닮은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신”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거리”나 “장벽”이나 “두려움”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하신 사람을 축복하시며 이르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집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을 관리했습니다. 이사람을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유지되고 보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위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 여자에 대해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시는 가장 큰 계명을 생각나게 합니다.아담에게 여자는 자신보다 더 자신 같이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 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서로 가릴 것도, 감출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 안에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들이 몸으로, 영혼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31절에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합니다. 앞서 6일 동안의 창조 역사에서하나님께서는 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십니다. 사람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 사람은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주인공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오직 “사람을 위해” 혹은 “나를 위해” 세상을 지으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나”라는 존재는 특별하고 존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이것이 나를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또 나자신이 나를 보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로 인해 무한히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세상을 지으시고, 그 중심에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사람이 그 말씀에순종하는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서를 지키시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는 계명을주셨습니다. 사람이 이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상의 질서가 보전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 이것 하나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알듯이 아담과 하와가 뱀의 꾀임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와 관계 뿐 아니라 모든 관계들이 다 깨어져버렸습니다.
가장 먼저 사람의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임했습니다. 본래는 자신을 벌거벗은 그대로도 한없이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봤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대로 가져다가 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이는 자신과의 관계가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또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숨게 되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은 마치 어린 새끼 사자가 집채만한 아빠 사자의 꼬리를 잡고 장난을 하듯, 그렇게 하나님과 격의 없이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으며, 그 온유한 음성 조차 무섭게 들리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연합하던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주종 관계로 왜곡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축복이며 사랑의 결실인, 자식을 잉태하고 해산하는 과정에 큰 고통과 수고가 따르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땅도 저주를 받아서 이전처럼 사람을 위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내는 대신, 먹을 수 없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평생 땀을 흘리며 땅과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깨어진 관계 속에 살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깨어진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짓게 되는 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불순종,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음, 자신을 높이는 교만, 그리고 세상의 것들을 좇는 우상숭배입니다. 이러한 죄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께서 심히 미워하시는 것들입니다.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죄들은 거의 대부분 이 네 가지들 중하나이거나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겹쳐진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죄에 빠지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 중심 (God-centered)”의 삶을 살지 않고 “나 중심(self-centered)”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곧 나를 왕으로 모시고, 또 이런 나를 높이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대신 우상들에게 절을 합니다.
사실 오늘날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나의 행복을 위한 이기적인 삶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을 위해 큰 창고를 짓고 그곳에여러 해 쓸 물건들을 가득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즐거워하자!” 그는 오직 자신의행복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는 행복의 근원은 “많은 재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십니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취하시고, 그의 재물은 이웃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어진 창조 질서를 강제로회복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도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묻기를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영생을 얻으리이까?”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늘에 있는 보화”를 얻도록 도우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예수님을 좇는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깨어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가난한 이웃보다 자신을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는 예수님의 삶과 비교할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삶은 가장 먼저 “겸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또 죄인들에게 한량 없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가운데 계셨지만 흠도 점도 없는 거룩한삶을 사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이런 삶을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시련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이 예수님의 길을 사람들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5절에 보면, 예수님의 도를 전하는 사도 바울을 핍박하면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교만하고불순종하고 무자비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정상을 벗어난 “이단”이며, 세상의 질서를무너뜨리는 “염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리고 우리도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극도로 미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이런 우리의 본성에 머물러 있든지, 아니면 본성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며 십자가의 원수로 살든지, 아니면 세상의 미움을 받으면서 십자가의 도를 따르든지 해야 합니다. 이 둘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며, 이웃들에 대한 사랑이며, 또 세상의 죄와 죽음과어둠의 권세를 이기는 거룩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이런 미덕들을 실천한 훌륭한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사람들의 미덕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그렇게 하셨기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사랑하셔서 우리를위해 그 몸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서는 온전히 죽으시고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생명을 바쳐 “온전히 이루셨음”을 나타냅니다.
첫 사람 아담은 단 한번의 불순종으로 낙원을 잃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던 모세는 단 한번 화를 냄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덕은 완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불태워 세상을 밝히는 하늘의 해와같습니다. 그리고 이 해와 같은 예수님에 비하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도 바람에 흔들리는 희미한 촛불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그냥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를 다시 살리고 회복하는 죽음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대해 순종하셨을 때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참 생명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성령께서 우리들 속으로 돌아오시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곧 우리의 의이며, 생명이며,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들을 다 포괄합니다. 성경의 교훈들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말한 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한 말이 합당합니다. 반대로 누가 가르치는 어떤 교훈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스른다면, 그 교훈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내면을 살피는 시금석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거나 두려워한다면,이는 우리 안에 영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가 빛처럼 환하고, 천국처럼 아름답고,생명처럼 귀하게 보일때까지 기도하며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와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을 비추는 진리의 빛입니다. 매일 이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배우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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