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
요한계시록 2:1-7
요한계시록 2,3장은 예수님께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시는 편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들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세우신 것들입니다. 또 이들은 우상들이 난무하고, 거짓 사도들이 횡행하며, 핍박자들이 들끓는 척박한 세상을 견디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디 귀한 보배와 같은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편지들은 이들에 대한 칭찬들과 함께 매우 준엄한 책망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통치자이심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예수님의 신부로서의 교회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거룩하고, 순결하며, 완전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은 일곱 교회들 중 처음으로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에베소는 로마 시대에 소아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에베소에 머물며, 두란노 서원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9:9,10). 한편, 에베소는 아데미와 제우스 같은 헬라 우상들은 본거지이기도 했으며 (사도행전 19:35), 그런 만큼 복음이 전파되면서 일어나는 영적인 싸움도 치열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세워지고 성장한 에베소 교회는 다른 교회들에 대한 본부 역할을 했으며, 이 서신에서도 일곱 교회들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에베소 교회는 매우 모범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한 일들, 이들의 수고, 그리고 인내를 칭찬하셨습니다. 이들은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거짓 사도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여러 고난들을 견디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책망할 것이 한 가지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이들이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는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 두시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진리의 빛”입니다. 이 촛대가 없다면, 교회는 더 이상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빛”이 아닙니다. 마치 불이 꺼진 등대와 같습니다. 존재 의미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처음 사랑”이 그만큼 중요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과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말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주님께 대한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들은 깊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 가운데 죽음을 기다리는 고아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늘 굶주림과 갈증, 허무함과 곤고함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로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시는 목자로 오셨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은 마치 뜨거운 광야에서 발견한 “시원하고 맑은 샘물”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는 참 기쁨이 되셨습니다. 그저 예수님으로 인해 행복했습니다. 온 몸과 마음에 생기가 돌며, 팔 다리에 힘이 솟구치며, 얼굴은 화사한 웃음으로 환하게 펴졌습니다. 길가의 잡초마저 예쁘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조차 즐거웠습니다. 매일의 삶이 주님과의 행복한 데이트였습니다. 이들은 정말로 주님을 사랑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중간에 어디에선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에베소 교회의 면면을 보면, 이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어 보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교회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한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큰 성전과 많은 성도들을 갖고 있는 번창하는 교회입니다. 성전 안에는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며 음식도 준비하고, 찬양 연습도 하고, 수양회 준비를 위한 기도 모임도 하고, 교회 운영을 위한 회의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 말을 거는 사람도 없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몇 명이 지나가면서 힐끗 눈길을 줄 뿐, 모두 자기 일에 바쁘고, 자기들끼리 즐겁습니다. 예수님은 구석 자리에 조용히 홀로 앉아 계시다가 쓸쓸히 교회를 떠나십니다.
교회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이며,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산성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받았을 때, 우리는 이 축복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우리를 축복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주신 축복들을 “관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보전되도록 그리고 더욱 번창하도록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음과 정성을 쏟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중심이 주님께로부터, 주님이 주신 선물들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를 “내 것으로” 관리하고 지키기 위해 주님과도 다투고 불화하며, 주님을 미워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본성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음 만나신 곳은 “광야”에서였습니다. 그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깊은 사랑, 곧 첫사랑을 나누었습니다. 호세아 9:10a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때의 사랑을 추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또 예레미야 2: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했습니다. 밤낮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양이 목자를 따르듯 졸졸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광야”를 벗어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은 참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신명기 8:7-9절은 이 땅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이 얼마나 축복된 땅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복된 기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축복을 베푸시는 한 편으로, 이들에게 하나님을 잊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신명기 8:11-14a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들이 고생을 한 이유는 그 땅이 척박하거나, 그 땅에 사는 적대적인 이방 민족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고생을 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 의해 수없이 많은 침략을 당했습니다. 이들의 살 길은 오직 회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곧 자신들을 위해 왕을 세운 것입니다. 다른 이방 나라들처럼, 자기들을 다스리며 자신들을 위해 나가서 싸울 왕을 세운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대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사는 대신, 자신들의 땅과 재산과 생명을 관리하고 보호해줄 “관리자”를 세운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보다 안정되고 안락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같은 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찾았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해서 계속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훌륭한 종교인” “독실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전도도 하고, 사랑으로도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나 봉사 자체를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사랑은 마치 “소금”과 같습니다. 음식에 맛을 내기 위해서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 소금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추가 없으면 무로 대신하거나, 파가 없으면 양파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금이 없다고 대신에 고춧가루를 넣을 수 없습니다. 짠 맛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 대신 옷을 사주거나 돈을 주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그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것으로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계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고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이스라엘이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하나님께서 계실 뿐이었습니다. 광야에서 그 둘은 그렇게 사랑을 시작했으며, 그저 서로를 가진 것으로써 충분히 행복하고, 충분히 풍요로웠습니다. 이는 그 둘이 서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오직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크리스천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늘고 교회가 커지면서 신자들의 마음도 부유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윤택한 삶을 유지하고자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시간보다 모여서 회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마음은 말씀에서 멀어지고 수 많은 근심들로 짓밟히고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 피곤하고 고난스러운 “투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며 안타까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되신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또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비유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전부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처음 사랑”이란 꼭 “처음에 했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사랑,” “가장 높은 사랑,” “가장 우선 되는 사랑”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다시 하나님께 대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오직 주님과만 단 둘이 앉아 지는 석양 노을을 바라보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며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먹고, 마시고, 쉬어야 합니다. 오직 이 사랑 안에 우리의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가졌을 때 정말 기쁘고 행복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과 성령님을 주셨는데도 기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행복이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참으로 회개할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회개함으로 이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며, 모든 일을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며 끝맺는 삶이 되기를,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생의 샘물을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4:1-26) (0) | 2016.08.22 |
---|---|
하나님을 힘입은 다윗 (사무엘상 30장) (0) | 2016.08.15 |
산 자와 죽은 자 (누가복음 24:1-12) (0) | 2016.08.01 |
강청하는 기도 (누가복음 11:5-8) (0) | 2016.07.25 |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 1:1-28) (0) | 2016.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