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청하는 기도
누가복음 11:5-8
누가복음 11장은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신 것 같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2-4절 말씀은 유명한 “주기도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과는 약간 다르지만, 이 말씀들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또 오늘 말씀인 5-8절 말씀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기도를 하는 방법이나 자세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실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천국의 곳간 문을 여는 열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본문의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늦은 저녁에 갑작스레 여행 중인 친구가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에게 줄 음식이 전혀 없었던 이 사람은 같은 마을에 사는 다른 친구를 찾아가서 떡 세 덩이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들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이 친구가 이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는 문도 열지 않은 채 안에서 말합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보십니다. 8절에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롯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이 이야기에서 떡을 빌려주는 친구는 흔히 하나님 아버지와 비유가 됩니다. “강청하는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십니다. 문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강청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 “강청한다”고 번역된 말의 뜻을 제대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원래의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부끄러움, 체면 또는 자존심이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들은 이를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담대함 (boldness), 부끄러움이 없음 (shamelessness), 끈질김 (importunity, persistence), 뻔뻔스러움 (impudence) 등입니다. 이것들에 비추어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의 “강청함”은 부분적으로는 “자신을 버림”에서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떡을 빌리러 가는 일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도 다들 잠자리에 든 밤 늦은 시간에 말입니다. 또 혹시나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체면이나 자존심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면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자신의 친구를 위해 떡 세 덩이를 구했습니다.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이나 거절당할 위험도 무시한 채, 오직 배고픈 친구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강청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을 밤 늦게 방문한 사람도 그리고 주인공이 떡을 빌리기 위해 찾아간 사람도 모두 “벗”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주인공은 한 배고픈 친구를 위해서 또 다른 친구에게 떡을 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사정은 좀 더 복잡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주인공은 자신의 배고픈 친구와의 관계도 생각해야 하지만, 이 다른 친구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떡을 빌려주는 친구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고, 매일 만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인공 입장에서는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례히 밤 늦게 찾아가서 떡을 빌려달라고 하고, 거절당하고, 빌려줄 때까지 버티다가 말다툼이라고 일어난다면 이런 망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 친구와의 관계도 예전과 같이 않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이 사람의 무례함과 염치없음에 대해 수군거릴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이 주인공이 떡을 빌리기 위해 감수하는 위험은 대단히 큰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강청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모세의 기도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용서해주시도록 위험한 협상을 벌입니다. 그는 처음에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질문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대답하십니다. 소돔성의 상태를 잘 아는 아브라함은 이것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되는 의인들의 수를 50명에서 45명으로, 40명으로, 30명으로, 20명으로, 그리고 마침내 10명으로 깎아 내립니다.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아브라함은 계속 “내 주여 내가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 말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 힘든 것임을 말해줍니다. 말하자면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이 염려하듯이, 그의 기도는 너무 지나쳐서 하나님을 노하시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위험한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같은 18장의 17,1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자신의 절친한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며, 천하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와 축복을 받은 이상, 아브라함은 이제 가만히 앉아서 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산 꼭대기에 앉아서 소돔과 고모라에 임하는 “하나님의 불 심판”을 구경만 해도 됩니다. 그 동안 저들이 행한 불법한 일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쌤통이라고 고소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식들을 뒤집어엎고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위험한 줄다리기를 합니다. 그의 무리한 요구는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호의와 축복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최선을 다합니다. 계속해서 “무례를 행하며 선을 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죄인들에 대한 더 많은 용서와 긍휼을 끌어내기 위해서 뻔뻔하고 끈질기게 졸라댑니다. “강청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는 모세에게서도 같은 일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자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9,1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하셨듯이, 모세에게도 죄악된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모세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밝히십니다.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모세는 입을 닫고 가만히 있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하시도록 하면, 저 골치 아픈 사람들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또 “큰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일석이조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모세도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여러 말로 간청합니다. “……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2b).” 심지어 이렇게도 말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31). 모세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축복과 영생의 약속까지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 옆에 서서 혼자 “큰 나라”가 되는 대신, 죄악된 백성들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 영원한 저주를 받기를 청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기도는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강청하는 기도”를 하게 했을까요? 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기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죄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매우 부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총에 있어서 이들은 세상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각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죄인들”을 위해 그와 같은 “부요함”을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먼지와 같이,” “죄인들 중의 하나로” 여기며, 죽을 각오로,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참으로 진실했으며, 죽음보다도 강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노를 푸시고, 그 뜻을 돌이키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강청하는 기도”의 가장 훌륭한 모범은 사실 예수님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악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죄인들의 중보자(Mediator)로 오셨습니다.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중재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당연히 하나님의 보좌 옆에 앉아서 이 일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포기하시고,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악한 범죄자가 서야 할 자리인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그리고 온 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죄인들을 벌하시느니 차라리 나를 벌하시라 하시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노를 단신으로 막아 서셨습니다. “아버지! 저희를 용서해 주옵소서!” 강청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강청하는 기도는 사랑입니다. 강청하는 기도의 힘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두려움, 체면, 자존심 따위를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담대히 기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상식의 선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하심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오늘 말씀의 주인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밤 늦은 시간에 친구를 찾아가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강청합니다. 그는 이렇게 하는 대신, 저녁 식사도 하지 않은 채 밤 늦게 자신을 찾아온 여행자 친구를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야! 최소한 저녁은 어디서 해결하고 왔어야지!” 하지만 그는 친구의 무례함을 책망하는 대신, 그 친구의 피곤함과 배고픔을 자신의 문제로 “떠 안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나 밤거리를 헤매며,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떡을 빌리러 다녔습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는 전체가 하나의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게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반어법을 이용한 강조문입니다. 예수님의 요지는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지 않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 하나님은 강청하는 기도에 대해 절대로 “No”라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도를 내심 간절히 기다리고 계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이렇게 자기를 버리는 간절한 기도로 당신께 나아오기를, 그래서 당신의 맹렬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죄인들을 용서하고 마음껏 축복할 수 있기를 기다리십니다. “강청하는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문을 닫고 침소에 누워 잠드시기는 커녕, 밤새 깨어 문을 열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마음을 부요하고 게으르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시 죄인들의 자리, 가난한 자들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나의 구원을 위해 울부짖던 그 간절함으로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동정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구원을 나의 생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안되면 말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죽을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깊은 속에 이 사랑의 마음, 강청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9/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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