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9:1-7
토마스 엘리엇(Thomas Eliot)이라는 시인이 쓴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시를 지은 작가의 깊은 속은 잘 모르겠지만, ‘죽은 땅’에서 깨어나 잠깐의 고단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겪다가 다시 그 죽음의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의 인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황무지’란 생명의 소망이 없는 황폐한 우리의 마음과 같습니다. 때로는 욕정의 몸부림으로 가늘고 여린 가지를 내지만 결국은 앙상하게 말라 사그라지며 오히려 황량함을 더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에 나오는 장면 또한 토마스 엘리엇의 ‘잔인한 사월’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사월이 결코 잔인한 달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길을 걷는데, 길 가에서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소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일생 단 한 번도 무엇인가를 본 적이 없이 평생을 그렇게 어둠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그를 본 제자들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입니까?” 이 제자들의 질문은 많은 것들을 말해줍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들은 이 소경의 불행한 삶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 눈에 이 소경은 지금 누군가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질문을 하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소경으로 태어나지 않은 자신들에 대한 “자기의(self-righteousness)”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건강한 눈을 볼 때 “적어도 나는 저 소경만큼 중한 죄인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과 자부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이 사람의 소경 됨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곧 그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이렇게 덧붙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실수를 하신 것은 아닌지요? 날 때부터 소경이라니 도대체 그 어린 핏덩이가 무슨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소경의 비참한 현실을 눈 앞에 두고, 이런 제자들의 의문은 어떤 대답으로도 속시원하게 풀어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우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생각에 거대한 ‘지각 변동 (seismic shift)’을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곧 ‘사람의 일’로 이 소경의 삶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의 삶을 ‘하나님의 일’로 설명을 하십니다. 또 제자들은 소경의 불행을 ‘과거의 일들에 대한 결과’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불행은 이미 엎지른 물입니다.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소경 됨을 ‘장차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낼 재료’로 보셨습니다. 이 소경 거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그릇’입니다. 그의 고난이 깊은 만큼이나 그 그릇에 담길 하나님의 영광도 큽니다. 소망이 넘칩니다.
예수님의 대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키워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어떤 ‘좋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선한 일을 하신다는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들과 구분되는 근본적인 차이들 중 하나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신(god)을 섬깁니다. 곧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위해 어떤 서비스들을 행합니다. 희생을 바치거나, 공덕(merits)을 쌓거나, 고행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들은 영광스러우며, 우리 영혼에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매우 쉬운’ 신앙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런 본성은 마치 들나귀처럼 완고해서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들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언제나 ‘내가 한 일들’이 중요합니다. ‘나의 일’ 때문에 자랑하고, ‘나의 일’ 때문에 절망합니다. 이 와중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볼 겨를도 없고 또는 믿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쉬워 보이지만 전혀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8:34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 소경 거지에게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호통을 치며 그를 쫓아냅니다. 제자들이나 다른 유대인들이나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 이 소경 거지는 죄에 따른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소경을 위해서 친히 어떤 좋은 일을 하신다는 것은 이들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음을 뻔히 보고도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믿기는커녕 이 불쌍한 사람을 마을에서 쫓아냈습니다. 또 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까지도 안식일에 이 일을 했다는 이유로, 곧 안식일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몰아세웠습니다 (16절). 하나님께서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의 일을 하고 계심을 눈 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이들은 이것을 부인했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심지어 이 소경 되었던 사람과 그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핍박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덮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참으로 무서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41절).
고린도후서 3:13,14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이 말씀은 출애굽기 34장에 기록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40주야를 함께 지내면서 돌에 새긴 율법 곧 십계명을 받아 내려왔습니다. 모세는 이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했던 모세의 얼굴에 광채(radiance)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서 사람들이 그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서 읽은 고린도후서 말씀은 왜 모세가 그의 얼굴의 광채를 가렸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장차 없어질 것”은 “옛 언약” 곧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거룩한 사람들 곧 죄가 없는 의인들이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죄 가운데 태어난 소경 거지”나 “안식일을 범하는 갈릴리 목수 예수”와 같은 예외적인 죄인들이 있지만 자신들은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죄악된 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됨은 그들의 무지와 완악함으로 더욱 악해져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장차 없어질 것 곧 옛 언약의 결국”이었습니다. 율법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더 깊은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얼굴을 덮고 눈을 가리고 있는 이 수건을 벗겨내시고 이제 자신들의 추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치료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새 의의 옷을 입히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지 않았습니다. 계속 “죄 가운데 태어난 소경”으로 살기를 고집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주시고 이 주님을 통해 능력으로 행하시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일들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심하게 이들은 눈이 멀고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으셔서 진흙을 이기시고, 이를 이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명하셨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눈을 씻자 그의 눈이 떠지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육신의 눈만 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36-38절에 따르면, 이 소경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며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그 일은 선한 일이며, 능력의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매일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진흙과 같이 천한 이 소경에게,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멸시하고 조롱하던 이 ‘죄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신 일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침이나 진흙 자체에 눈을 치료하는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유력한 설명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써,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의 눈을 손으로 만지시면서 그의 믿음을 격려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설명은, 침으로 이긴 진흙과 같이 매우 빈약한 재료를 사용하심으로써 소경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분명히 하셨다는 것입니다. ‘침으로 이긴 진흙’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하고 (고린도전서 15:8) 또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1:15). 그는 또 모든 사람들이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사람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침으로 이긴 진흙’과 같습니다. 누가 이것을 내 눈에 바른다고 하면 저는 “악!” 비명을 지르며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더럽고 천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저는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중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잘난 구석이 없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들만 많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무엇인가 해보려고 애를 써왔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은 허탈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자신을 보면, 앞에 인용한 시인 엘리엇의 ‘황무지’가 생각이 납니다. 또 ‘침으로 이긴 진흙’과 같기도 합니다. 약함들과 수치들만 남은 아주 볼품이 없는 ‘덩어리’입니다. 이것이 ‘나의 일’의 결과이며 결국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일’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약하고 악한 자신에 대해 눈을 뜨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내가 소경임을 고백할 때 내 눈을 뜨게 하십니다. 내가 귀머거리임을 인정할 때, 내 귀를 열어주십니다. 내 악함을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시고, 내 약함을 토로하면, 나를 강하게 하십니다. 병든 내 영혼을 주님 앞에 들고 나아가면 치료해 주시고, 주님 앞에 나의 수치들을 드러내면 이를 깨끗하게 하시고 의의 옷으로 덮어주십니다. 내 슬픈 마음을 위로하시고, 어두운 내 안에 빛을 비추시며, 절망으로 주저앉은 다리에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선한 일들은 끝이 없습니다. 이 모든 좋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침으로 이긴 흙’같은 내게 하십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린도후서 3:5).
이제 거의 틀림없이 우리 마음 속에 생기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나요?”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다시 “나의 일”로 돌아가려는 나의 끈질긴 본성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4,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 빛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한 일을 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빛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믿음 안에 살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할 일들이 보입니다.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주시고, 주님의 기이하고 영광스러운 일들을 보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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