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과부의 기도 (누가복음 18:1-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11. 7. 05:42

과부의 기도

 

누가복음 18:1-8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한 과부의 이야기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과부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소수자(social minority)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누가복음서에는 여러 명의 과부들이 등장합니다. 가장 먼저는 2:36-38절에 안나라는 여자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녀는 결혼한지 7년 후에 남편을 잃고 그 이후 84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성전에 거하면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처음 맞이하며 주님을 세상에 소개하는 첫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7:11-17절에는 나인이라는 성에서 외아들을 죽음에 빼앗기고 우는 과부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그 아들을 살리시고 그녀에게 돌려주십니다. 21:1-4절에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헌신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심으로 그녀를 칭찬하십니다. 또 오늘 말씀에 나오는 한 맺힌 기도의 주인공 또한 과부입니다. 누가복음을 과부들의 복음서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누가복음은 우리들의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과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과부는 그 도시의 재판관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하고 탄원했습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화해할 수 없는 원수와 달리 해소할 수 없는 원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원한을 푼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것이 그녀의 유일한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녀는 자나깨나 이것에 대해 생각하고 골몰했을 것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녀의 원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과부인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남편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7,8절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원한 대신 택하신 자들곧 예수님의 제자들의 원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속히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 어떻게 풀어지는 것입니까?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 하늘로부터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물을 씻기시고, 또 사망이나, 애통함이나, 애곡함이나, 아픔을 모두 없애시며 다시는 이것들이 생기지 않도록 영원히 멸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약속이며,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서 소망 가운데 기도하도록 하는 샛별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는 좀 무덤덤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음악 교과서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한 몸이어야 할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원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저조차도 이 노래를 마치 눈물의 기도처럼 매우 비장한 마음으로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이런 원한도 잊혀지고, 이에 따라 통일의 소원도 점차 식어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통일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통일이 되면 어쩌나?” 하며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때 일어나는 일은,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다시 사는 것입니다. 결혼으로 비유하자면, 세상과 이혼을 하고 예수님과 정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신랑이 되실 예수님께서 그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나는 세상과 이혼했는데 세상에 남겨져 있고, 나의 신랑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 버리셨습니다. 생이별을 한 것입니다.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에 성대한 혼인 예식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뿐입니다. 이제 내가 그것에 대해 죽었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과부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신자들의 상태를 여러모로 표현합니다. 베드로전서 1:1절에는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고, 누가복음 12:32절에는 적은 무리여라고 하고, 고린도후서 11:2절은 정결한 처녀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소수자(minority)”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소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거할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세상에서 주님의 정결한 처녀로 자신을 지키면서 외로운 싸움을 오랫동안 싸워야 하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의 삶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흩어진 나그네도 아니고 적은 무리도 아닙니다. 믿는 자들이 꽤 살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상과 이혼하고, 주님의 정결한 처녀로 신랑을 기다리는 삶이 궁색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을 지키는 외로운 싸움을 싸우면서 원한이 쌓이기는커녕, 옛정이 되살아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소록소록 돋아납니다. 실제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4:10). 오늘 본문 말씀의 8절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반문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께서 이제 막 과부의 낙망치 않는 기도를 설명하신 것을 생각하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붙들고 기다리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은 과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렇게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시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바라던 모든 것들이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소망이 다만 소망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23,24) 바울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소망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참 소망을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문제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의 구속이란 우리가 영으로뿐 아니라 육체로도 부활을 통해 새 몸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하며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됨”(고린도전서 13:12)을 의미합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이 문제는 다른 무엇으로는 전혀 해결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랑을 잃은 과부와 같습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남기고 간 빈 자리는 세상의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 자리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으로 그 빈 자리를 채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선지자 안나가 84년을 성전에게 밤낮으로 기도하며 산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다른 위로를 찾는다면, 자칫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소망을 향하여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과부는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하고 탄원을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도 원수가 있습니다. 바로 사단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간절함만큼이나 단호하게 사단을 대적해야 합니다. 이것은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약해지는 만큼, 원수 사단에 대한 원한도 약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본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주된 내용은 한 그룹의 연합군 요원들이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독일군 지역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독일군에게 사로잡혔습니다. 당연히 독일군은 이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연합군 요원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입을 열지 않기로 서로 다짐을 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요원들을 한 방에 가둬놓고 한 명씩 불러다가 취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불려나간 요원은 온갖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반 죽은 상태로 질질 끌려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다른 한 명의 요원이 불려나갔습니다. 당할 일을 생각하며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한 이 요원을, 독일군은 뜻밖에도 매우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담배와 차를 권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들이나 던지며, 심지어 재미있는 농담으로 웃기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이 요원은 말짱한 모습으로 다른 요원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말짱한 모습을 본 다른 요원들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성급한 대원은 그의 멱살을 잡고 너 독일군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바른대로 말해!” 하며 그를 몰아세웠습니다. 이 때 한 지혜로운 대원이 독일군의 간교한 의도를 알아챘습니다. 정신을 차린 대원들은 서로 싸우기를 멈추고, 다시 원수 독일군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며, 결국은 그 방을 빠져 나와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의 원수는 사단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수한 임무를 주셨으며 그 임무를 사단이 매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6:9,10절 말씀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세상에서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구주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갖고 이를 세상에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이 이 연합군 대원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원수 사단 또한 믿는 자들이 주님께서 주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훼방합니다. 그것은 원수 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우리가 보이는 사람들과 헛된 육체의 싸움을 싸우도록 이간질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간질에 속아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우리의 원수가 사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높이 들고 비추어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과부가 원수와 싸우지 않고, “재판관과 싸웠다는 사실입니다. 과부는 자신의 원한을 원수에게 가서 풀지 않고, 재판관에게 가서 풀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과부가 매일 와서 그를 괴롭히자, 마침내 그의 태산과 같은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의 한 맺힌 기도를 들으시고 이를 풀어주실 분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입을 열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원수 사단은 그 본성이 변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이길 수도 없습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담배와 차를 권하고 즐거운 농담을 한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풀어지고, 사명을 잊고, 여유를 즐기려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마치 치열한 전쟁터에서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영적인 실상에 눈을 뜰 때, 우리가 보게 되는 나의 참 모습은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과부입니다.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기 위해 재판관 되신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기게 기도하며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싸우는 과부입니다. 이것이 신랑 되신 예수님과 떨어져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참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오심으로만 이루어지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게 하며, 예수님을 그리워하게 하며, 앞으로 위로 나아가게 하며,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게 우리가 가질 소망이며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우리 각자가 이 믿음을 가진 자로 주님께 발견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