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율법 아래의 삶과 성령 안에서의 삶 (로마서 7:1-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6. 10. 24. 11:19

율법 아래의 삶과 성령 안에서의 삶

 

로마서 7:1-6

 

사람들은 연대를 표기할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준으로 주전(B.C.)과 주후(A.D.)로 시간을 나눕니다. 크리스천들도 자주 자신의 개인사(personal history)를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누어 얘기합니다. 개인에 따라 경험하는 바에 차이는 있겠지만, 이 두 시기는 여러가지 면에서 서로 다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공부할 로마서 7:1-6절에서, 사도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 한 개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매우 중요하고 근본적인, 그리고 축복된 변화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 변화를 간단히 말하자면, 과거에 율법 아래 살았던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히 중요한 변화이며, 크리스천들이 누리는 모든 다른 축복들의 기초(found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여전히 과거의 삶 곧 율법의 노예로, 심지어는 더욱 무거워진 죄의 짐을 지고 고통스럽게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의 삶과 성령 안에서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깨닫고, 주님께서 피를 흘려 우리에게 주신 이 값진 은혜를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되면 자연스럽게 이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기는커녕 드러나는 자신의 못된 내면을 보면서 괴로움만 커집니다. 구원의 은혜는커녕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노력하지만,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절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쓸 때에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들을 향해 바울은 오늘 본문의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크리스천의 변화는 마치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쓴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용모가 똑 같이 생긴 톰(Tom)이라는 거지 소년과 에드워드(Edward)라는 왕자가 서로 옷을 바꿔 입은 후 일어나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왕자가 된 거지 소년 톰은 궁정에서 왕자로서의 예절, 언어, 습관 등을 배웁니다. 거지가 하루 아침에 왕자가 되었으니, 이러한 변화에 따르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는 하루에도 수백 번 왕자 옷을 벗어버리고,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변화도 이와 같습니다. 비유로 말하면, 거지가 왕자가 된 것입니다.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고, 하얀 예복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변화의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변화의 시작입니다. 먼저 하얀 예복을 입고, 그 예복에 걸맞은 품성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는 오랜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변화는 안에서부터 밖으로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변화는 밖에서부터 안으로일어나는 것입니다. 곧 먼저 겉에 왕자의 옷을 입은 다음에, 내면에 왕자의 풍모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신분 상승은 소설 왕자와 거지에 나오는 톰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더럽기 짝이 없는 죄인이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처음 받는 선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톰이 왕자 옷을 입고 괴로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새 옷이 매우 거북할 수 있습니다. 속은 변하지 않은 옛사람 그대로인데, 겉은 눈이 부시도록 하얀 예복을 입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옷을 벗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계속 입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어 거룩한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Godet이라는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Christian holiness is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all pagan ethics. Paganism says, ‘Become what you ought to be’; Christianity says, ‘Become what you are.’” (기독교인의 성결함은 모든 다른 이교도들의 도덕률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교는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너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왕자와 같은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왕자이니 왕자답게 되어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서의 삶과, 성령 안에서의 삶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내게 수없이 많은 무거운 의무들과 규칙들을 지우고 이것들을 다 지키고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먼저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 안에 심겨진 왕의 도곧 예수님의 말씀이 자라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명실상부, 곧 겉과 속이 일치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를 위해 채색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요즘처럼 옷이 흔하지 않은 그 시절에, 이 채색옷은 매우 유별났을 것입니다. 이런 옷을 입고 있다면 아마도 금방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두 아들들 중 오직 요셉만 이 옷을 가졌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다른 형제들이 평범한 옷을 입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이 눈에 띠는 채색옷을 입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옷을 입을 만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유별난 사랑이 형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요셉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채색옷을 그냥 옷장 속에 넣어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인 이 채색옷을 늘 입고 다녔습니다. 이로 인해 형들의 미움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채색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사실 요셉에게 있어서 진정한 채색옷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기록한 창세기 39장에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2절에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하며, 3절에는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하고, 5절에는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심으로……” 합니다. 21절에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라고 하며, 23절에는 “……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서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은 죄수로 옥에 갇히기까지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요셉 자신이 믿음으로 이 채색옷을 꿋꿋이 입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낮아질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갔지만, 결코 이 왕자의 예복을 벗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황태자답게 위엄 있고, 성결하며, 고상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황태자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Become what he is”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왕자와 거지의 톰 이야기나 요셉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소설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바로 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는 톰이나 요셉보다 더 놀라운 변화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겪게 되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대하며 기다리는 반전은 무엇일까요? 이사야서 61:10,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여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앞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의의 옷을 입히셔서 주님의 신부로 단장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은 내 안에 싹이 움트는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믿는 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이며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이른 봄에 움트는 어린 싹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겨우내 얼어있던 차가운 흙을 뚫고 봉긋하게 솟아오른 새싹은 우리에게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비록 보이기에는 여리디 여린 싹이지만, 긴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고 땅 속에 고이 간직했던 예쁘고 보드라운 연두색 두 팔로 기지개를 켜는 모습은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일으키시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황무지 같은 마음에 예수님을 한 알의 로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예수님이 어리고 연한 싹으로 우리 속에 움트는 것입니다. 단 한번도 하나님 앞에서 연하고 부드러운적이 없었던 내 속에서, 늘 질긴 소가죽처럼 완악하고, 두려운 노예처럼 경직되고, 온갖 쓴 뿌리들이 뒤엉켜 있고, 겨울 밤처럼 어둡고 차갑게 얼어붙었던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보드랍고 연한 싹이 돋아나는 것입니다. 아주 작지만, 내 생애에 전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던 그런 예쁜 싹입니다. 검고 칙칙한 땅이 아무리 넓게 뻗어있어도, 오직 한 포기 연한 싹으로 인해 이제 생명의 소망이 해처럼 밝게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에게 의의 겉옷을 입히시고, 또 우리 속에 연한 싹으로 움틀 씨를 뿌리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과 속을 모두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이 채색옷을 벗지 말고 믿음으로 꿋꿋이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도록 온 마음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베드로전서 3:6절은 흥미로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녀의 특징으로 남편에게 복종한 것과, 두려운 일에 놀라지 않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 번역들 중 하나인 NLT(New Living Translation)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이 부분을 남편이 무슨 일을 하든 두려워하지 않고로 번역합니다.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매우 독특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남자의 아내로서 사라는 놀라고 두려워할 일들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나, 아브라함의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애굽 왕의 첩이 될 뻔한 사건이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독자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것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라는 두려워하지 않고 남편에게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을 남편으로 따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인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두려움 없는 순종또는 믿음의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 없는 순종이야말로 성령 안에서의 새 삶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아무리 두려운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고 아멘하고 순종할 때, 우리가 말씀과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힘있게 성장하며, 내가 주님을 닮아가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의 옷을 입은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정에서 왕의 도를 배우는 왕자이며 공주입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순종함으로써, 우리 안에 성령께서 강력으로 역사하며 예수님의 연한 싹이 움트고 자라는 축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