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품군의 비유
마태복음 20:1-16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십니다.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천국에서의 삶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는 가치가 없지만 천국에서는 매우 중요한 가치들, 그리고 반대로 세상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천국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지식들을 받아들이고, 배우고, 익힘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 20년 전에 저는 한국을 떠나서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천국같이 평화로운 삶을 꿈꾸며 뉴질랜드 이민을 추진했습니다. 한국에서 이민 절차를 밟는 중에 “이민 설명회”라는 것을 하는데, 주로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교민이 초청 강사로 참석하여 그곳에서의 생활을 설명하고, 또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참가자들의 질문 내용은 이 새로운 나라에서의 교육, 안전, 음식, 취업, 문화 등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주머니가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 배추를 거기에서도 살 수 있나요?” “거기에도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원들이 있나요?” 그분의 질문의 요지는 자신이 그 동안 한국에서 누려왔던 것들을 뉴질랜드에서도 똑같이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머니의 집요한 질문들에 지친 강사가 결국은 한 마디 했습니다. “아주머니, 그냥 한국에서 사세요!” 뉴질랜드가 아무리 살기 좋은 나라일지라도, 그곳에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좋은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천국의 시민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고서는 그곳이 결코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아주머니에게는 다행히도 “한국”이라는 다른 선택이 있지만, 장차 임하는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 임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오직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가 또는 들어갈 수 없는가 두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영생”과 “영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실 때 “기뻐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4:17) 하셨습니다.
천국이 세상과 다른 것은, 뉴질랜드나 미국이 한국과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정반대”인 것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하십니다. 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하십니다. 이와 같이 천국에서의 삶은 세상에서의 삶과 많이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천국과 세상 사이의 차이로 인해서 생기는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천국에서의 삶의 매우 중요한 원리들 중 한 가지를 우리에게 설명하십니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도 똑 같은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악한 주인”으로 보게 됩니다. “행복한 천국”을 오히려 싫어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천국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품군의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몇 명의 일군들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에 일반적인 하루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아침 9시에도 밖에 나가서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자신의 포도원에 들여보내 일을 하게 했습니다.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낮 12시에도 그리고 오후 3시에도 똑 같은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 오후 5시가 되었을 때도 주인은 나가서 종일토록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던 사람들을 불러 자신의 포도원에 들여냈습니다. 하루 종일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 마지막 남은 이들은 일군으로서 별로 쓸모가 없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또 일할 시간이 겨우 1시간밖에 남지 않은 마당에, 이들이 포도원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이들을 불렀습니다. 마침내 날이 저물고 품삯을 줄 때가 되었습니다. 품삯은 나중에 온 자들부터 지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루 온종일 일했을 때의 품삯이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한 일꾼들은 이를 보고 자신들이 더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매한가지로 한 데나리온의 삯이 주어졌습니다. 이에 실망한 사람들이 주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을 했는데, 어떻게 이들이 하루 종일 더위를 참고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받습니까?” 그러자 주인은 말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 품군들과 포도원 주인 사이의 갈등은 사실 두 가지 중요한 근본 원리들 사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천국의 원리입니다. 세상의 원리란 “내가 한 일(work)에 대한 권리(right)”이며, 천국의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과 은혜(grace)”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한 일꾼들은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한 일(work)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근거로 더 많은 품삯을 받을 권리(right)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인은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sovereignty)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grace) 주인은 사실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늦게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은, 이 포도원 주인이 없었더라면, 하루 종일 빈둥거리다가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의 집에는 배고픈 아내와 자녀들이 눈이 빠지도록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불러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또 하루치 품삯을 주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포도원 주인의 이렇게 자비로운 일이 하루 종일 수고한 일꾼들에게는 그만 악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불평부당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주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실 포도원 주인이 시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한 일꾼들은 처음 계약한 대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고,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의 감사함과 즐거움을 망쳤을까요? 주인의 불공평한 처사 때문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의 감사함과 즐거움을 망친 것은 자신들의 “욕심과 시기심” 때문입니다. 늦게 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는 것을 본 이들은 자신들이 “더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또 주인이 늦게 온 자들을 자신들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을, 곧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 속에 있던 감사함과 즐거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뙤약볕 속에서 하루 종일 땀 흘린 것이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주인도 밉고 또 늦게 와서 돈만 받아가는 자들도 미웠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렇게 “욕심과 시기심”은 순식간에 천국을 지옥으로 바꿀 수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인”으로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기를 원하는 “천국”이란 대개 우리의 욕심이 충분히 채워지는 것 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러한 욕심과 시기심은 세상의 삶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많은 크리스천들이 장차 들어갈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상급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앉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와 다를 바 없이 살겠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오늘 본문에 대한 성경 공부를 준비하면서 읽은 참고서에 쓰여진 한 구절입니다.
“In the realm of grace upon which the kingdom proclaimed by Jesus is based, it is wrong to set one’s mind upon the rewards that will set one on a higher level than others. Indeed, even where such differences in the future reward may be real, in comparison with the common reward that will be shared by all in the kingdom, they amount to nothing.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왕국이 속한 은혜의 세계에서,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어떤 상급들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설사 장래에 받을 상급에 그러한 차이들이 실제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들은 왕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게 될 공통의 상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은 성경 말씀이 아니고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이겠지만,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포도원 품군의 비유’만을 놓고 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천국은 한마디로 “은혜의 세계”입니다. 이 은혜는 왕국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다만 “그의 뜻에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갚으실 의무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뜻에 따라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진리를 영접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포도원 품군의 비유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즉 포도원에 아침 일찍 들어온 품군들은 유대인들로, 그리고 나중에 들어온 이들은 이방인들과 죄인들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그들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셔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세리, 간음한 여인,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사마리아인이나 로마인과 같은 이방인들 등 “가치 없는” 그리고 “자격 없는” 자들을 부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이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불공정한 천국”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1장 30-32절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대신, “너희들” 곧 이방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일찍 온 품군이 “더 많이 받을 것”을 기대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천국 복음을 거부하는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버리셨습니다. 이는 이들을 낮추어 “긍휼이 필요한 자들”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11장의 결론으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아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의 “주권”과 “긍휼”에 집착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행한 일(work)을 근거로 내 권리(right)를 주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선물”인 천국을 싫어하며 또 천국의 주인 되신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너무 “독선적”이 아니신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천국에 비하면, 내가 세상에서 이룬 모든 업적들은 먼지만도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들까지도 희생하시며 수고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랑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우리가 행한 일들을 감추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때 우리가 이를 감사함으로 받으며 또 그 은혜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또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오직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긍휼만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천국 시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속에 틈타고 드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와 자기 영광의 유혹을 이겨내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겸손한 천국의 일꾼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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